한 사람의 인생 바꾼, 896화짜리 이상한 무협소설 <절대회귀>

아르떼 2026. 6. 1. 19:4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arte] 용호성의 아트 트랙
장영훈 무협소설 <절대회귀>

제 취미는 ‘무협지 읽기’에요. 네? 무협지요?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을 때, 선뜻 ‘무협지 읽기’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해요’ 라든가 ‘주말마다 미술관에 가요’에 비하면, ‘밤마다 최신화 올라오길 기다리며 896화짜리 무협을 완독했어요’라고 말하는 건 어쩐지 민망한 느낌이 든다. 물었던 사람도 ‘네?, 무협지요?’ 하며 그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당황스러워할 수 있다. 무협지 읽기란 말하자면 남몰래 즐기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마무리된 장영훈의 <절대회귀>에 대해서는 그 민망함을 거두고 꼭 한번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9.96의 별점, 158,527개의 댓글

2022년 10월부터 2026년 4월까지, 3년 6개월에 걸쳐 896화가 연재된 이 소설의 마지막 화에는 2,865개의 댓글이 달렸다. 별점은 9.96. 전체 조회수는 1억2천만. 그리고 연재 기간 동안 누적 댓글은 158,864개였다. 도대체 무엇이 수많은 사람을 이토록 열광케 했던 것일까?

“무협이 이렇게 감동을 주고 생활에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글이 삶의 태도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나와 같은 시대에 계셔주셔서. 이런 인생을 내게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무협 소설의 독자 댓글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 문장들은 이 소설이 독자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말해준다. 무협소설 하나가 어떻게 이런 격려와 치유의 공간을 만들어냈을까. 이 작품은 과연 어떤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대본소 천덕꾸러기에서 웹소설 총아로

무협소설이 문학의 위계에서 그동안 차지해온 위상이 그리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문학의 기준에서 보면 무협은 과장되고 정형화된 세계관 속에서 비현실적인 무공이 난무하는 저급한 판타지로 치부되기 쉬웠다. 한국 창작 무협이 저변을 넓혀가던 1980년대는 사마달, 서효원, 야설록, 금강 등의 작품이 대본소를 채우던 양산형 무협의 시대였다. 나 역시 이 무렵부터 무협의 세계를 접하기 시작했지만, 대본소에서 다섯 권짜리 묶음을 빌려 나올 때면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서둘러 가방 안에 욱여넣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영웅문>을 필두로 하여 번역 무협소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이후 1990년대에 이르러 용대운과 좌백 등 새로운 작가군이 이끈 이른바 ‘신무협’의 기치 아래 서사의 품질을 확보하면서 한국 무협은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다른 한편으로 PC통신과 도서대여점을 거치며 명맥을 이어오던 무협소설은 온라인 플랫폼을 만나면서 웹소설 시장을 새롭게 열었다. 1980년대에 데뷔하여 역사무협과 추리무협 스타일을 개척했던 금강 작가는 2002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장르소설 커뮤니티 사이트인 ‘GO! 武林(고무림)’을 개설하였고, 2006년에는 문피아(MUNPIA)로 이름을 바꾸면서 국내 웹소설 시대의 문을 열었다. 특히 2013년에는 유료화서비스를 도입하면서 전업 웹소설 작가들의 활동 기반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후배 작가들이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장영훈 역시 문피아의 공모전에 <보표무적>으로 당선되면서 작가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웹소설 장르로 팬덤을 넓혀가던 무협소설은 다른 판타지 소설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지난 10여 년간 이른바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이라는 지배적 문법을 받아들인 작품들을 쏟아냈다. 여기에 더하여 미래를 아는 주인공이 선점한 지식과 초월적 무력으로 적들을 압도하는 속칭 ‘먼치킨’ 스타일이 장르의 공식처럼 적용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주는 카타르시스는 명확하다. 악인은 철저하게 응징되고, 갈등은 순식간에 해소된다. 이 과정에는 어떠한 고민이나 망설임도 없으며, 독자는 그 전지적 쾌감 속에서 현실의 무력감을 보상받았다. 온갖 위기 상황을 매번 시원스레 해결하는 말초적인 ‘사이다’ 정서가 플랫폼 알고리즘과 맞물리면서 웹소설의 문법을 규정한 것이다. 이 같은 구조 속에서 세상은 단지 주인공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한 일방적인 무대에 불과했고, 관계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거나 완성된 주인공 곁에 배치되는 장식으로 머물렀다.

회귀했지만 돌아오는 곳이 달랐다

<절대회귀> 역시 이러한 장르 문법 위에서 태어났지만, 그 궤적은 전혀 방향을 달리했다. 당대의 무림 세상을 삼분하는 정사마(正邪魔) 세력 중 마도(魔道)를 대표하는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검무극은 회귀 전 삶에서 강적 화무기의 공격으로 아버지와 형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겪는다. 이후 평생을 고통과 좌절 속에 보내며 마침내 회귀의 길을 찾아 과거로 돌아왔지만, 새 삶에서는 단지 강해지거나 복수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전생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이들을 찾아가 과거에는 미처 챙기지 못했던 관계를 복원하는데 주력하며 그와 관계를 맺었던 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결핍의 삶을 들여다본다. 이 소설이 무협 장르를 전혀 모르던 이들까지 흡수한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 혼자 다 안다는 전능감에서 오는 다른 회빙환의 판타지와 달리 <절대회귀>의 판타지는 소홀했거나 지나쳤던 관계들을 다시 만들어갈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전생에서 대화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던 아버지와 함께 사냥을 나가고, 목숨을 걸고 경쟁했던 형과 나란히 걸으며, 천마신교를 이끌어가는 여덟 명의 마존들 삶에 드리운 상처와 결핍을 보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간다.

절대자 아버지의 꽃무늬 잠옷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대개 세 가지 중 하나다. 억울하게 죽어 복수의 동기를 제공하는 아버지, 악행을 저질러 주인공이 넘어서야 하는 아버지, 혹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 어떤 방식으로든 아버지는 주인공의 서사를 위해 소비되는 배경 캐릭터에 머문다. 하지만 <절대회귀>에서 천하를 호령하는 절대자인 아버지 천마 검우진은 이 전형에서 벗어나 있다. 역대 천마 중 가장 무재(武才)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는 강자이지만, 이 소설에서 그는 아들과 함께 성장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천마신교를 이끄는 아버지의 무력을 내세우지 않는다. 천마신교 앞에 조성된 마가촌의 염소수염 상인은 천마와 소교주와 여덟 마존의 인형을 기념품으로 만들어 파는데, 천마는 슬그머니 그 인형을 사다가 자신의 침소를 장식한다. 그리고 천마는 꽃무늬 잠옷을 입고 잠든다. 먼저 간 아내의 추억이 담긴 잠옷이다.

회귀 전 검무극과 아버지의 관계는 가깝지 않았다. 후계자 경쟁에서 밀려난 차남으로서 그는 늘 아버지의 시선 바깥에 있었다. 화무기의 공격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검무극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복수심이 아니었다. 추억다운 추억 하나 없이 그를 잃어버렸다는 공허함이었다. 그래서 회귀 후 검무극은 아버지를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냥 함께 시간을 보낸다. 같이 사냥을 나가고, 낚시를 하고, 여행을 가고, 시시콜콜한 농담을 이어간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 장면들은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오래 남는다. 무림의 절대자 천마와 그의 둘째 아들은 그저 함께 걷고, 말을 섞고, 어색함을 조금씩 견디며 회귀 전에는 없었던 관계를 만들어간다. 회귀 전 검무극에게 없었던 것은 승리가 아니라 이런 사소하고 평범한 시간들이었다.

아버지와의 사냥 에피소드 이후 댓글 창에는 독자들의 아버지 이야기가 쏟아졌다. 함께 낚시를 갔던 기억, 모처럼 연락드려 단둘이 밥을 먹었다는 자랑,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함께 어딘가를 간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는 반성. 그리고 이제라도 연락드리고 싶지만, 세상을 떠나신 지 한참 되었다는 회한까지. 웹소설의 댓글 창이 집단적인 고백의 공간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형 검무양과의 관계도 그 연장선에 있다. 아버지와 형이 가까이 나란히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검무극은 생각한다. "한 걸음 가까워졌으니 이제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 실망과 서운함은 오직 친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이니까." 친밀함이 안도가 아니라 더 큰 책임의 시작임을 아는 문장이다. 무협소설에서 이런 감각의 문장을 만나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다.

여덟 마존 — 강해서 외로운 사람들

이 소설을 다른 무협들과 확연하게 갈라놓는 결정적인 매력은 무공이 아닌 관계에 주목한 점이다. 검무극이 천마신교를 이끄는 여덟 마존(魔尊)을 규합하여 후계자로 성장해가는 과정은 이 소설의 서사적 뼈대인데, 그 방식은 힘이나 권위에 의한 장악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 각자가 가진 삶의 상처와 결핍을 알아채고, 대화로 그것을 건드리며 채워가는 과정이다. 제자가 되기도 하고, 형제가 되기도 하고, 함께 무공을 익히는 친우가 되기도 한다. 꼬장꼬장하고 까칠한 혈천도마와는 그의 젊은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남겨진 상처를 함께 치유하고, 삶의 목표를 설정하지 못해 방황하던 일화검존과는 수시로 검술을 나누며 무공의 길을 함께 걷는다. 외로운 주정뱅이 취마와는 위계를 넘은 진짜 형제 같은 친구가 되며, 모두가 두려워하는 독왕과는 그 고독의 시간을 함께한다. 그릇된 길을 갈 뻔했던 청선에게는 스승을 넘어서 홀로 서는 기회를 열어주며, 자신이 아닌 형을 후계자로 선택한 마불 역시 끝까지 설득하며 결국 마음을 열도록 만든다. 여느 무협에서라면 그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에 머물 마존들과 이처럼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삶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거울이 된다.

더 나아가 무림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어야 할 정파와 사파의 후계자들과는 무공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함께 춤추고 노는 상황까지 만들어내며 기분 좋은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지난한 어려움 속에 화무기를 물리친 후에는 그 과정에서 만나서 사소한 도움이라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후일담을 만들어낸다. 천마신교를 이끄는 여덟 마존들과는 천하제일 낚시대회를 열어 투닥거리는 시간을 즐긴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싸움이 없는 느슨한 무협은 아니다. 데뷔 20년을 넘긴 장영훈 작가가 전작 <보표무적>과 <절대강호>에서 보여준 묵직한 필력은 여전하다. 다만 전투 장면을 남발하지 않을 뿐, 칼을 맞대는 순간은 언제나 인물들의 세계관과 감정이 충돌하는 ‘관계의 압축판’으로 기능한다.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기에 그 여운이 깊다.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

마도(魔道)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검무극은 이렇게 답한다. “저의 마도는 주점의 탁자를 함부로 부수지 않는 것입니다.” 무협에서 주점은 늘 부서지는 공간이었다. 고수들이 등장하고, 시비가 붙고, 탁자가 날아가고, 주점 종업원 점소이는 애꿎게 두들겨 맞는다. 하지만 장르의 관습 속에서 그 피해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검무극은 바로 그 관습에 제동을 건다. 강한 자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부서진 탁자와 겁먹은 사람들을 본다. 그래서 천마신교 앞 마가촌의 한 주점이 이 소설에서 모든 관계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된다. 주점 주인 조춘배는 소설 전체에서 걸쳐 이름 있는 조연으로 남는다.

이처럼 강자들의 이야기에서 배경처럼 지나쳤을 그 자리에, 이 소설은 사람을 놓는다. 길가며 지나치는 주변부 인물 한 명 한 명에게 모두 삶의 맥락을 부여한다. 어느 독자의 말처럼 ‘모두가 주인공인 이상한 소설’을 만들어낸 것이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이 긴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소설이 처음부터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받은 건 돌에 새기고, 주는 건 물에 새기는 사람”이라는 검무극에 대한 묘사가 주인공 캐릭터의 전부를 압축한다. 강한 자의 미덕을 이렇게 표현하는 무협 소설을 이전에는 읽은 적이 없다. 책 좋아하고, 꽃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마존들의 이야기가, 10대와 20대를 넘어, 30대와 40대와 50대와 60대의 독자들이 각자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심야독서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이처럼 특별한 전개는 플랫폼상에서 전대미문의 문화적 현상을 낳았다. 매일 밤 새로운 에피소드가 올라올 무렵이면 독자들은 댓글 창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스스로 이 시간을 ‘심야독서모임’이라 불렀다. 그 자리는 서로의 내밀한 삶을 고백하며 서로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나누는 거대한 치유의 광장이었다.

소방공무원 시험에 최종합격했다는 독자의 소식에는 4,010개의 좋아요와 359개의 축하 댓글이 달렸다. 내일 하는 수술이 두렵다는 독자에게는 3,263개의 좋아요와 267개의 격려 댓글이 이어졌다. 6년간의 투병 끝에 “이제는 쓸 약이 없다고 하네요... 이제 저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안 남았다고 치료는 의미 없다는 통보를 엊그제 받았습니다... 완결 안 나게 몇 년이고 길게 써 주세요... 다 읽을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틸게요”라고 덤덤히 적은 어느 투병 중인 독자의 고백 아래에는 6천 명이 넘는 ‘댓글 동료’들이 찾아와 기적을 바라며 힘내라는 메시지를 촘촘히 새겨 넣었다.

자신을 ‘강릉댁’이라 밝힌 62년생 할머니는 백신 후유증으로 24시간 통증에 시달리며 문밖출입도 못 하던 날 이 글을 만났다며 이런 인사를 남겼다. “그 고통스러운 날들을 견디게 해줬던 것은 사랑하는 아들들도, 오래된 친구들도 아니라, 함께 이 글을 읽으며 인생을 배우게 된 댓글 친구들이었습니다.” 전통적인 무협 독자층을 넘어 내년에 칠순인 할머니가 스스럼없이 댓글을 남겼고, 또 다른 날에는 20대 후반의 여성 독자가 “무협소설이 내 인생 글이 될 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매일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읽으며 힐링한다는 고3 수험생도 있었다.

중소기업을 운영한다는 어느 독자는 “작가님 글을 읽으면서 한 가지는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을요. 덕분에 이제는 직원들이나 가족들에게 제가 느끼는 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의 글은 이제 50을 바라보는 제게 너무나 큰 충격이자 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라고 감사의 글을 남겼다. 첫째 아이를 순산하며 작중 인물들처럼 의리 있고 낭만 있는 아이로 자라길 바란다는 어머니의 글에 대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뻐하며 따스한 글을 채워가는 수천 명이 함께 하는 댓글 게시판은 이미 단순한 독서 공간이 아니었다. 20년 넘게 비행을 하다 암 수술을 받고 버겁던 시간에 이 댓글들로 위로받았다는 승무원의 고백에서 50이 훌쩍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웹소설에 댓글을 달아본다는 직장인 아줌마의 고백까지. 회계사 시험, 수능 시험, 8남매의 막내, 10년 전 아버지의 죽음, 큰 형의 별세, 암 수술. 독자들은 댓글 한 줄 한 줄에 자신의 삶을 녹여냈다.

이쯤 되면 <절대회귀>의 댓글 창은 단순한 객석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가 함께 써 내려간 또 하나의 거대한 ‘삶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보다 더 완벽한 대답은 없다. 좋은 이야기는 독자를 골방에서 혼자 울게도 하지만, 때로는 타인 앞에 자신의 기억과 아픔을 꺼내놓고 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장영훈의 작품은 이런 시간을 통해 하나의 웹소설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적 감상의 형식을 획득했다.

896화 끝에 남는 것

896화의 대장정 끝에 남겨진 것은 말초적인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삶의 태도를 바꾸는 문장들이다.

“진정한 자유로움은 홀로 떨어질 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제대로 잘 엮였을 때 얻는 것임을.”

“혼인은 상대가 비를 안 맞게 해주는 게 아니다. 기꺼이 함께 비를 맞는 일이지.”

"그래, 늙어서 멈추는 게 아니라, 멈추면 늙는 거다."

"노력이란 힘듦의 범주에 있지 않다. 정말 힘든 건 노력할 기회조차 없는 상황이다."

"우린 알면서도 실수한다. 남들에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그 말을, 정작 해야 할 사람에게는 몇 년이 지나도 안 한다. 가깝다는 이유로."

이런 문장들이 무협소설 안에 있다. 장영훈 작가는 칼과 피가 난무하는 무림의 이야기 속에 이런 다정한 말들을 심어두었고, 독자들은 강호라는 허구의 장치를 통과하면서 느낀 감성으로 자신이 마주한 현실의 관계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한 독자의 말처럼 “어떻게 살 것인가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지나쳐왔던 내 모든 행동과 마음들을 제대로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이 작품 안에 있었다.

우리가 삶에서 가장 후회하는 것은 대개 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일이 아니다. 그때 조금 더 다정했더라면, 조금 더 오래 귀 기울여 들었더라면, 조금 덜 무심했더라면 하는 마음이다. <절대회귀>는 그 후회의 자리에 무협의 상상력을 놓으며 묻는다. 다시 살 수 있다면, 당신은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 함께 비를 맞겠느냐고.

이런 작품을 그저 길티 플레저라 부르기엔 너무나 아깝다. 혼자만의 자리에 숨겨두었던 장르 안에서 뜻밖에 가장 진지한 삶의 감각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누군가 취미를 묻는다면, 가끔은 무협지를 읽는다고, 특히 최근에 읽은 <절대회귀>라는 작품이 정말 괜찮으니 꼭 읽어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용호성 문화예술평론가·前 문체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