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만든 미술의 미래, 리움서 부활하다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2026. 6. 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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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전 ‘다른 공간 안으로’
주디 시카고 등 11명 작품 발굴
1950~70년대 환경예술 재조명
야마자키 양방향 작품 ‘빨강’에
韓 정강자 ‘무체전’ AI로 첫 복원
정강자가 1970년 선보인 ‘무체전’은 전위예술을 정치 선동으로 여긴 정부 탄압으로 사흘만에 철거됐고, 리움미술관은 유족이 제공한 작가의 생전 목소리를 AI로 되살려 이를 복원했다. /사진제공 리움미술관

녹음이 짙은 공원 한복판에, 붉은 비닐로 감싼 폭 3.6m 직육면체(큐브) 형태의 방이 공중에 떠 있다. 초록과 빨강의 대조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바닥에서 70㎝ 높이인 까닭에 관객이 허리를 숙여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안에서는 붉은 공간에 잠긴 몰입적 경험을 할 수 있고, 밖에서는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그림자 극장처럼 바라볼 수 있는 양방향 작업이다. 작가 야마자키 츠루코가 1956년 일본 아시야 공원에서 ‘제2회 야외 구타이 미술전’을 통해 처음 선보인 작품이다. 20년 후, 1976년 베니스비엔날레가 ‘환경’이라는 주제 아래 큐레이터 제르마노 첼란트에게 중앙전 기획전을 의뢰했을 때, ‘여성 작가가 만든 최초의 환경미술’ 사례로 조명됐다.

이 역사적인 작품이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으로 들어왔다. 기획전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은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소외됐던 여성 작가들의 시대를 앞서간 ‘환경’ 작업들을 처음으로 재조명한다. ‘환경(ambiente)’이란 1949년 루치오 폰타나가 처음 제시한 개념인데, 관람자가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작품 안으로 직접 들어가 빛·소리·색·공기·움직임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예술 형식을 의미한다. 지금은 ‘설치작업’이라고 통용되기도 하는데, 일찍이 1950~70년대 이 장르를 개척했던 실험적 여성 작가들은 미술사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를 주목한 이번 전시는 주디 시카고 등 여성 작가 11인의 잊혔던 환경 작품을 실물 크기로 재구성했다. 2023년 뮌헨 하우스데어쿤스트에서 기획돼 로마 국립21세기미술관, 홍콩 M+로 순회해 한국에 이르렀다.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정강자(1942~2017)가 포함됐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1970년 그의 첫 개인전에서 공간 전체를 작품으로 제시했다. 검은 장막의 공간으로 들어서면 사이렌이 울리고 연기가 흘러나온다. 놀란 관객의 얼굴에 조명이 비춰지고, 작가의 목소리로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라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당시 정부는 전위예술을 정치 선동으로 판단해 사흘 만에 전시가 중단된 ‘무체전’이다. 유족이 작가의 목소리를 제공했고, AI로 재구성해 한국 여성 작가가 시도한 최초의 공감각적 환경작품으로 출품됐다.

‘환경미술’ 자체가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니 어린이 관람객이 가장 잘 즐긴다는 게 미술관의 전언이다. 리지아 클라크의 ‘집은 곧 몸’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고무공,밧줄, 거울 등을 거치며 공간을 통과하는 작품인데, ‘침투,배란,발아,배출’이라는 작품의 부제는 생명 탄생의 과정을 암시한다. 콜롬비아 작가 레아 루블린의 ‘움직이는 남근’과 ‘침투/배출’도 인간의 생식과정이라는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관람객은 투명비닐로 만들어진 터널 같은 작업을 통과하며 즐기는데, 아이러니하게도 1970년 당시 지하터널 준공행사에서 처음 발표돼 국가 발전과 근대화를 상징하는 터널을 풍자적으로 비꼬았다.

주디 시카고의 1966년작 ‘깃털의 방’은 하얀 벽의 방을 약 136㎏의 깃털로 채운 작품이다. 남성 중심의 건축사에서 ‘단단한 재료’가 가진 권위에 대한 비판이자, 당시 주류이던 추상미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작품이다. 원작에서는 닭털이 쓰였지만, 이 전시에는 ‘동물학대 없이 채집된 거위 깃털’을 재료로 삼았다. 깃털을 뿌리거나 누워도 되고, 출구에서 깃털제거용 접착용구가 제공된다. 이 외에도 탄생에서 죽음, 재탄생으로 이어지는 삶의 여정을 무지개 빛깔 통로로 나타낸 알렉산드라 카수바의 ‘스펙트럼 통로’, 빛과 소리로 환경 전체를 채우고 1966년 처음 선보인 이후 제자들까지 가세해 세대를 이어 협업 구조로 지속되는 ‘드림 하우스’ 등 관람객이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환경’ 예술을 봉인된 역사적 장르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살아 있는 형식으로 거듭나게 하는 전시”라며 “전문적이고, 미술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면서 대중적인 프로젝트”라고 소개했다.

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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