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북적북적] 한 권의 책이 된 이야기를 파는 공간, 성수동 극장 ‘무비랜드’

김호이 기자 2026. 6. 1.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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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랜드 [사진= 김호이 기자]

[한국독서교육신문 김호이 기자]

서울 성수동 골목 한켠, 30석 규모의 작은 극장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영화 한 편을 틀고 끝나는 공간이 아니다. 누군가는 영화를 보러 오지만, 누군가는 라디오를 듣고, 또 누군가는 굿즈를 만들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영화가 중심이지만, 결국 사람과 취향, 대화와 경험이 엮이며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공간. 성수동 소극장 '무비랜드(Movieland)' 이야기다.

2024년 2월 문을 연 무비랜드는 단순한 독립영화관이 아니다. 스스로를 '이야기를 파는 오프라인 플랫폼'이라 정의한다. 영화 상영을 매개로 관객과 창작자, 공간과 경험이 연결되는 큐레이션 기반 극장이다.

무비랜드의 극장주인 모춘 대표는 인터뷰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같이 놀아보고 싶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영화 좋아하잖아. 그러면 극장 만들어서 사람들과 같이 놀아보자."

가볍게 던진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선택은 위기의 끝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3층 상영관 [사진= 김호이 기자]

무비랜드를 만든 사람들은 원래 영화업계 전문가가 아니었다. 콘텐츠 브랜드 '모베러웍스(MORE BETTER WORKS)'를 운영하던 팀이었다.

모춘과 소호는 과거 라인(LINE)을 퇴사한 뒤 '더 나은 일(More Better Works)'을 화두로 브랜드를 만들었다. 노동과 일의 태도에 대한 메시지를 굿즈, 콘텐츠, 책으로 풀어냈다.

반응은 뜨거웠다. 2020년 노동절 팝업스토어에는 약 7000명이 방문했고, 이듬해에는 1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몰렸다. 브랜드 에세이 《프리워커스》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협업 신용카드 역시 10만 장 이상 발급되며 화제를 모았다.
1층 매점에서는 팝콘과 음료가 판매된다. [사진= 김호이 기자]
1층 굿즈샵에서는 티셔츠 등 다양한 굿즈들을 판매한다. [사진= 김호이 기자]

하지만 성장 곡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브랜드 메시지는 반복되기 시작했고, 제품을 위해 억지로 아이디어를 짜내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결정적으로 2021년 말 진행한 더현대서울 팝업 이후 수억 원대 재고와 번아웃, 팀 변화까지 겹치며 존폐 위기에 놓였다.

최근 출간된 《무비랜드 메이킹북》에 따르면 당시 팀 내부에서는 "브랜드가 살아남으려면 메시지가 더 넓은 차원으로 확장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커졌다. 결국 답은 '공간'이었다.

모춘 "브랜드를 지속하려면 중심축이 되는 물리적인 실체가 필요했다"며 성수동의 오래된 건물을 매입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건물 가격의 약 80%를 대출받아 20평 규모의 2층 구옥을 매입했고, 이후 약 2년에 걸친 설계와 고민 끝에 무비랜드가 탄생했다.
2층 대기 공간[사진= 김호이 기자]
2층 대기공간 [사진= 김호이 기자]

"영화 산업이 아니라 콘텐츠 산업이라고 생각했다"

극장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우려가 컸다. OTT 플랫폼 확산 이후 영화관 산업은 침체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극장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지금은 극장이 가장 어려운 시기"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모춘의 시선은 달랐다. "극장업이라고만 보면 안 되는 것 같았어요. 우리가 만드는 건 콘텐츠업이라고 생각했어요."

무비랜드는 기존 멀티플렉스 방식 대신 '큐레이션 극장'을 선택했다. 최신 흥행작 대신 누군가의 취향과 시선이 담긴 영화를 선정하고, 그 이유와 감정까지 함께 나누는 방식이다.

모춘 대표는 좋은 영화의 기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큐레이터가 됐을 때 '이 영화를 사람들과 함께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예요."

흥행 여부나 작품성만이 기준이 아니다.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게 만드는 감정이 중요하다. 보고 난 뒤 누군가와 대화를 시작하게 만드는 영화, 그것이 무비랜드가 찾는 콘텐츠다.

무비랜드가 일반 극장과 가장 다른 점은 '영화 이후'에 있다.

극장 안에는 큐레이터가 왜 영화를 선택했는지 설명하는 오디오·라디오 콘텐츠가 준비돼 있다. 영화와 연결된 소장품 전시도 열리고, 1층 기념품숍에서는 직접 굿즈를 제작할 수 있는 실크스크린 체험도 가능하다.

누군가는 영화를 본 뒤 전시를 둘러보고, 누군가는 스낵바에 머물며 여운을 즐긴다.

모춘 대표는 이를 "거미줄 같은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누군가는 영화보다 라디오 콘텐츠를 좋아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스낵바가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이야기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서로 엮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비랜드에서 영화는 시작점에 가깝다. 관객은 영화를 매개로 공간 안을 천천히 거닐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경험을 완성한다.

창작자의 취향이 콘텐츠가 되는 '큐레이터 시스템'

무비랜드를 특별하게 만드는 또 하나는 '큐레이터 시스템'이다.

이곳에서는 감독이나 평론가뿐 아니라 배우, 음악가, 예술가 등 다양한 창작자가 직접 영화를 고르고 소개한다.

문상훈, 박정민, 이제훈, 넉살, 김오키 등 다양한 분야 인물들이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관객들은 영화 자체뿐 아니라 '그 사람이 왜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모춘 대표는 "우리 이야기를 강요처럼 전달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감성을 통해 자연스럽게 메시지가 확장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무비랜드는 영화관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교류 공간이 됐다. 관객들은 영화만 보는 것이 아니라 취향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경험하며 새로운 대화를 시작한다.

왜 하필 성수동이었을까. 모춘은 '접근성'을 이유로 꼽았다.

"성수동은 사람들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오는 동네예요.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경험이 가장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최근 성수동은 브랜드 팝업, 전시, 독립 문화공간이 밀집한 라이프스타일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무비랜드 역시 단순히 영화 보러 오는 장소가 아니라 하루 일정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문화 공간이 되길 바랐다.

실제로 관객들은 영화 한 편만 보고 돌아가지 않는다. 굿즈를 만들고, 전시를 보고, 음료를 마시며 공간 자체를 경험한다.

현실은 쉽지 않았다…공사 중단 위기부터 영사기 사기 직전까지

하지만 무비랜드의 탄생 과정은 낭만만 있던 이야기가 아니었다.
무비랜드 메이킹북[사진= 위즈덤하우스]

《무비랜드 메이킹북》에는 공간을 만들며 겪은 시행착오도 솔직하게 담겼다.

건축 공사 중 이웃 민원으로 공사가 중단될 위기를 겪었고, 영사기 구매 과정에서는 거의 사기를 당할 뻔한 경험도 있었다. 일정과 예산은 수시로 바뀌었고 날씨와 변수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외부 협력업체와 팀원들이 함께 극장의 완성도를 고민하며 수차례 개관 일정을 미룬 끝에 2024년 2월 마침내 문을 열 수 있었다.

모춘은 이 과정을 돌아보며 "힘들었지만 결국 다 같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말했다.

"우린 그냥 이런 게 좋아서 해요"

무비랜드는 디지털 시대에 유독 아날로그적 감각을 중요하게 여긴다. 손으로 굿즈를 만들고,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을 강조한다.

그 이유를 묻자 모춘 대표는 예상보다 단순한 답을 내놨다.

"그냥 이런 게 좋아서 하는 거예요."

효율보다는 경험, 속도보다는 관계를 택하는 방식. 무비랜드가 가진 정체성도 여기서 비롯된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장비 관리, 고객 응대, 프로그램 운영, 공간 유지까지 극장은 손이 많이 간다.

그럼에도 모춘 대표는 "운영이 너무 재밌다"고 말한다. 그는 팀원들을 직원보다 친구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힘든 조건에서도 같이 만들어가는 경험이 단순한 동료 이상의 관계를 만들어요."

"놀면서 사는 삶, 영화처럼 살고 싶다"

개관 2년을 돌아보며 모춘은 "초반에는 1원도 못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름 성공적"이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공간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순간들이 가장 큰 성과라고 했다.

그가 꿈꾸는 삶은 의외로 단순하다.

"놀면서 사는 삶, 솔직하게 사는 삶을 영화처럼 만들어가고 싶어요."

인터뷰 말미, 그는 영화 같은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솔직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해요. 드러내기 힘든 부분도 이야기하고, 매일을 놀이처럼 즐기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면 좋겠어요."

무비랜드는 단순한 극장이 아니다. 이곳은 영화 한 편을 계기로 사람과 취향, 경험이 연결되는 공간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야기가 계속되는 곳. 성수동의 작은 극장 안에서는 오늘도 누군가의 취향이 다른 누군가의 삶과 조용히 연결되고 있다.

그리고 무비랜드는 여전히 같은 질문을 던진다. 좋은 이야기는 어떻게 사람을 움직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