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좋은 선수, 좋은 선배…박민지의 20승이 더 특별한 이유
- 태국 챔피언 분짠이 먼저 증명한 진심
- 기록을 넘어 사람을 남긴 챔피언.

"이제는 내가 이 위치와 기록에 어울리는 선수가 되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멋진 선배이자 선수가 되고 싶다."
KLPGA투어 통산 20승을 달성한 박민지(28·NH투자증권)가 우승 직후 남긴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한 우승 소감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박민지는 이미 그런 선배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먼저 보여준 선수는 지난주 E1 채리티 오픈에서 태국 선수 최초로 KLPGA투어 우승을 차지한 짜라위 분짠(27)입니다. 분짠은 우승 직후 박민지에게 점심을 얻어먹은 일화를 공개하며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언니(박민지)는 KLPGA투어에서 처음 사귄 한국 친구 가운데 한 명이에요. 항상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마워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점심도 사줬어요."
낯선 나라에서 투어 생활을 시작한 외국 선수에게 그 기억은 오래 남았습니다.
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분짠에게 한국 투어는 새로운 도전의 무대였습니다. 언어도 달랐고 문화도 달랐습니다. 그런 시기에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선수가 박민지였습니다. 지난해는 박민지가 KLPGA투어를 처음으로 우승 없이 보내며 힘들었던 시기였는데도 말입니다.
박민지가 말한 '귀감이 되고 도움을 주는 선배'라는 표현은 선언이 아니라 이미 실천되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 낯선 한국의 산악 지형 코스 적응에 애를 먹은 끝에 컷 탈락한 분짠은 US여자오픈 대기 선수로 있다가 출전이 확정되면서 미국으로 출국했습니다. 박민지의 우승 순간을 현장에서 지켜보지는 못했습니다. 어제 저녁 미국행 비행기에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소식을 들은 뒤 누구보다 반가워했습니다.
분짠은 "어제 저녁 미국행 비행기에 타고 있어서 우승 직후 박민지 프로와 이야기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같이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박민지의 경기력에 대해서도 깊은 인상을 전했습니다.
"그녀는 정말 훌륭한 선수입니다. 샷의 정확도가 매우 뛰어나고 퍼팅도 정말 놀라워요. 골프를 너무 쉽게 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게다가 플레이 속도도 정말 빠릅니다."
분짠의 말은 이번 20승이 단지 박민지 개인의 기록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승컵과 상금, 승수는 기록지에 남습니다. 그러나 한 선수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는지는 주변 선수들의 말 속에 남습니다.

이번에는 박민지가 KLPGA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새로 썼습니다.
박민지는 31일 경기 양평 더 스타 휴 골프 앤 리조트에서 열린 Sh수협은행 MBN 여자오픈 최종 라운드에서 보기 없이 버디만 8개를 잡아 8언더파 64타를 기록했습니다. 공동 6위로 출발했지만 마지막 날 순위를 뒤집으며 5타차 대역전 우승을 완성했습니다. 최종 합계 13언더파 203타. 그토록 고대하던 통산 20승 고지를 밟았습니다.
고(故) 구옥희와 신지애에 이어 KLPGA투어 역사상 세 번째로 도달한 기록입니다. 이제 1승만 추가하면 전설 구옥희와 신지애를 뛰어넘어 개인 통산 최다승 달성이라는 이정표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 우승이 더 특별한 이유는 기록 때문만은 아닙니다.
박민지는 우승 뒤 자신의 마음가짐 변화를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19승에서 20승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는 말을 계속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너무 하늘만 바라보며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린 건 아닐까."
그래서 생각을 바꿨습니다.
"이번 주에는 우승이 올 때를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손을 뻗어 당겨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마지막 날 64타였습니다.
주변에서는 "예전 전성기에 박민지의 독기 어린 눈빛이 돌아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실 박민지에게 지난 시간은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데뷔 후 처음으로 무승 시즌을 경험했습니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온 삼차신경통과 부진도 있었습니다. 지난해 상금 순위 40위에 머물렀고, 올 시즌에도 톱5에 한 차례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지난주 E1 채리티 오픈에서 거둔 공동 7위가 자신의 최고 성적이었을 뿐입니다.
한때 한 시즌 6승씩을 거두며 누구보다 빠르게 승수를 쌓았던 선수에게도 우승 공백은 낯설고 무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박민지는 그 시간을 기다림으로만 보내지 않았습니다. 스윙을 다듬고,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자신을 몰아붙였습니다. 이번 대회 마지막 날 보여준 눈빛에는 예전 전성기의 자신감과 긴 시간을 견딘 선수의 독기가 함께 담겨 있었습니다.
이 대회를 중계한 김재열 해설위원도 박민지의 20승을 특별하게 바라봤습니다.
김 해설위원은 "박민지 선수가 1라운드부터 과거 전성기에 보여준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더라. 마지막 날엔 챔피언조가 아니라 우승 부담 없이 편하게 점수를 줄일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본인의 노력과 하늘이 도운 20승이다. 평소에도 동료들을 잘 챙기고 어려운 이웃에게도 관심이 많은 따뜻한 심성을 지녔다. 본인의 말대로 앞으로 공격적인 플레이를 펼칠 것이다. 21승도 시간문제다"라고 말했습니다.
김 해설위원의 말처럼 이번 우승은 단순히 마지막 날 몰아친 결과만은 아니었습니다. 1라운드부터 살아난 자신감, 챔피언조가 아니었기에 오히려 덜어낼 수 있었던 부담, 그리고 긴 시간 포기하지 않은 노력이 맞물렸습니다. 여기에 선수로서의 성적뿐 아니라 동료를 챙기는 태도까지 더해지면서 박민지의 20승은 더욱 특별한 장면이 됐습니다.
박민지의 20승은 기록만 놓고 봐도 대단합니다.
KLPGA투어에서 20승은 아무나 닿을 수 없는 숫자입니다. 구옥희와 신지애라는 한국 여자골프의 전설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민지의 이름은 이미 역사에 새겨졌습니다.
박민지의 19번째 우승은 2024년 셀트리온 퀸즈 마스터즈였습니다. 이후 긴 기다림을 거쳐 다시 정상에 섰습니다. 통산 20승은 단순히 숫자 하나를 더한 우승이 아니라 오랜 공백과 부담을 이겨낸 결실이었습니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시간의 간격입니다.
KLPGA투어에서 통산 20승 선수가 나온 것은 신지애 이후 처음입니다. 신지애가 2010년 통산 20승을 달성한 뒤 무려 16년 만에 같은 기록이 다시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20승이 더 오래 기억될 이유는 숫자 바깥에 있습니다.
박민지는 우승 직후 더 많은 승수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상금왕도, 다승왕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 기록에 어울리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그는 이미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분짠은 박민지를 "투어에서 처음 사귄 한국 친구"로 기억했습니다. 점심을 사주고 먼저 말을 걸어준 선배. 낯선 투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 선배. 그 기억은 우승을 차지한 뒤에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사의 대상이 됐습니다.
이번 우승 상금 1억8000만 원을 받은 박민지는 상금 랭킹도 단숨에 끌어올리며 남은 시즌에 대한 기대를 높였습니다.
20승은 기록지에 남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좋은 선배, 좋은 친구, 처음 손 내밀어 준 선수로 기억되는 일은 기록지에 남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어쩌면 그것이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분짠은 E1 채리티 오픈에서 코리안 드림을 이뤘습니다. 박민지는 일주일 뒤 통산 20승이라는 역사를 썼습니다.
한 사람은 한국에서 꿈을 이뤘고, 또 한 사람은 한국 여자골프의 전설 반열에 한 걸음 더 다가섰습니다.
그리고 두 이야기를 이어준 것은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었습니다.
점심 한 끼였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였습니다. 그리고 먼저 다가간 선배의 마음이었습니다.
분짠은 최근 박민지에게 다시 한번 감사와 축하의 뜻을 전하며 "조만간 꼭 같이 밥을 먹자"라고 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삼겹살이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두 사람은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식탁에 마주 앉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통산 20승 챔피언과 태국 최초 KLPGA투어 우승자라는 타이틀보다 먼저, 서로를 기억하는 선후배의 인연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좋은 선수는 기록을 남깁니다.
좋은 선배는 사람을 남깁니다.
박민지는 지금, 두 가지를 모두 해내고 있습니다.

김종석 채널A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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