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이 좋아야 밥이 맛있다" 한국 HBM의 비결[반도체 8대공정]

김영은 2026. 6. 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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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선폭 결정짓는 '포토공정'
소재 국산화 성공 기업도
[커버스토리] 반도체는 나노미터(nm)의 세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만드는 최신 D램의 공정세대는 10nm인데, 크기를 설명할 때 흔히 ‘머리카락의 10만분의 1’에 비유한다. 상상 속에서조차 머리카락을 쪼개고 나누어 반도체 크기를 체감하는 일은 어렵다. 나노미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D램의 회로선폭은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10배 작고 적혈구의 700분의 1 크기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 위해 반도체는 굵직한 8개의 공정을 거친다. 글로벌 칩메이커를 뒷받침하는 반도체 8대 공정 생태계를 소개한다.

ASML 장비용 핵심 부품을 깎아내는 모습. 한국경제DB

D램을 쌓아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만드는 일은 좋은 쌀로 맛있는 밥을 짓는 과정이다.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HBM을 만들기 때문에 개별 D램 기술력이 HBM 성능을 결정짓는다.

한국산 메모리반도체가 AI 시대의 주역이 된 건 후공정(패키징) 기술 이전에 포토공정에서 극자외선노광장비(EUV)를 도입한 이후다. 2021년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네덜란드 ASML의 EUV 장비를 D램 생산에 활용했다. 더 미세한 회로를 그려 반도체 칩을 작게 만들고 성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포토공정은 웨이퍼에 빛을 쏘아 미세한 회로선폭을 새겨넣는 단계다. 투명한 유리판(포토마스크)에 그려진 회로 지도를 감광액(포토레지스트)이 발라진 웨이퍼에 빛으로 찍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이전까지 ASML의 EUV 장비는 주로 CPU, GPU, 모바일 통신칩 등 비메모리 반도체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정에 활용됐다. 장비 가격이 한 대에 1500억원이 넘었고 AI 시대가 열리기 전 D램에 필요한 건 기술력이 아닌 가성비였다. 
그래픽=박명규 기자

하지만 D램의 미세화 공정이 10나노미터(nm)급 영역으로 진입하면서 판도가 뒤바뀌었다. 기존에 널리 쓰이던 불화아르곤(ArF) 장비의 빛 파장은 193나노로 10나노대 초반까지 좁아진 D램의 회로를 그리기엔 빛이 너무 굵었다.

반면 EUV 장비의 빛 파장은 13.5나노로 기존 ArF의 14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회로를 그리는 빛이 미세해지자 메모리 생산에는 세 가지 혁신이 일어났다.

가장 큰 혁신은 생산성 향상이다. 칩 크기를 극한으로 줄일 수 있게 되면서 똑같은 크기의 12인치 웨이퍼 한 장에서 찍어낼 수 있는 반도체의 수가 급증했다. 2021년 EUV를 본격 적용한 4세대 10나노급(1a) D램은 이전 세대 제품보다 웨이퍼당 생산성을 25%가량 끌어올렸다. 

한 번 라인을 돌릴 때 쏟아지는 물량이 두 배가 되니 제조원가 절감도 따라왔다. 칩이 작아지고 회로가 미세해질수록 성능도 좋아진다. 전자가 이동하는 거리가 짧아져 처리 속도가 빨라지고 소모되는 전기 에너지는 줄어든다.

반도체 미세화는 핵심인 수율 개선에도 필수다. 과거 ArF 장비로 미세 회로를 그리려면 선을 여러 번 겹쳐 그리는 ‘멀티 패터닝’ 편법을 써야 했다. 기계를 서너 번씩 돌려 억지로 선을 얇게 만들다 보니 회로가 어긋나 불량이 날 확률이 높았고 제품 개발 기간도 늘어났다. 반면 EUV는 파장이 짧아 복잡한 회로도 단 한 번에(싱글 패터닝) 선명하게 찍어낸다. 

장점만 있는 것 같지만 가장 큰 문제도 따라왔다. 높은 비용이다. 하지만 미세화의 임계점에 도달하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들은 과감한 선제 투자를 감행했다.

미국 메모리반도체 기업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D램 생산에 EUV 장비를 도입한 건 불과 1년 전인 2025년부터다. 그동안 마이크론은 패키징 등 후공정 기술력을 내세워 HBM 시장에 도전했다. 하지만 가파른 램프업(생산량 확대)에 난항을 겪은 이유가 EUV 장비 도입에서 갈린다는 분석이 나왔다. 5세대(1b) D램까지는 EUV 없이 DUV 멀티 패터닝만으로 버티던 마이크론은 지난해 6세대(1c) D램 공정부터 결국 EUV 장비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한국이 소재 독립을 통해 EUV 생태계를 탄탄히 다지는 사이 미국의 제재로 ‘EUV 도입 노선’이 원천 차단된 중국은 처절한 독자 생존 모드에 돌입했다. 중국 메모리 기업 창신메모리(CXMT)는 EUV 공정 없이 DDR5 양산에 성공했다.

EUV 장비 부재로 인해 한국 기업과의 기술 세대 격차는 여전히 3~4년 뒤처져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시장에서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다. 파운드리 영역에서는 화웨이가 EUV 없이 ‘타우 스케일링 법칙’ 기반 로직 폴딩 아키텍처를 적용해 2031년까지 1.4나노급 칩 양산에 나서겠다고 발표했다. 물론 글로벌 반도체 업계는 이 같은 중국의 발표를 두고 발열 등의 문제로 ‘절반의 성공’이라며 냉정한 시선을 보낸다.

장비와 소재 제약에 가로막힌 중국의 상황을 한국도 맞닥뜨린 적이 있다. 2019년 일본의 기습적인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 규제 사태다. 당시 포토공정의 필수재인 고순도 불화수소와 포토레지스트 등의 공급망이 단번에 끊기자 소재 국산화에 성공한 기업들이 탄생했다.

켐트로닉스는 그동안 전량 일본 수입에 의존했던 포토레지스트의 핵심 용매인 PGMEA를 초고순도로 국산화했다. 동진쎄미켐은 2022년 국내 최초로 EUV용 포토레지스트를 상용화하며 반도체 고부가 소재 국산화의 선두에 섰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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