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윤정·구교환은 물론 한선화까지, 여태껏 이렇게 많은 인생 캐릭터 없었다

정석희 칼럼니스트 2026. 5. 31.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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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와 홍진경, 그리고 ‘모자무싸’ 배우들의 뿌듯한 재발견

[엔터미디어=정석희의 TV 돋보기] 요즘 흥미롭게 보는 프로그램이 MBC <소라와 진경>이다. 모델 일을 접은 지 꽤 오래된 이소라와 홍진경이 파리 패션위크 런웨이에 도전한다. 두 사람의 모험 같은 도전. 과연 성공할까. 연예인들이 남들은 얻기 어려운 귀한 기회를 쉽게 얻고도 허투루 흘려보내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이번에는 두 사람의 굳은 의지가 느껴져 좋았다.

2회에는 두 사람이 진태옥 디자이너를 만났다. 1993년 한국인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참가했다는데 당시 나이가 예순이었단다. 남들은 은퇴를 염두에 둘 나이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셈이다. 90이 훌쩍 넘은 지금도 아침마다 수영을 1000미터씩 한다니, 가장 관심이 가는 연예인이 올데이 프로젝트의 '타잔'이라니 놀랍지 않은가. '이제 슬슬 인생을 정리해야 하나?' 싶었던 참에 자극이 됐다.

<소라와 진경>을 보고 나서 허리를 곧게 세우고 보폭을 넓혀 걸어봤다. 생각보다 종종걸음을 걷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젊어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들시들한 상추도 찬물에 담그면 살아나지 않나. 그런 마음으로 생동감 있는 자세를 지니려고 요즘 애쓰는 중이다. 이소라의 취미가 탐조(探鳥)라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리 집 창밖 은행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었는데 신기하다고만 여겼지 유심히 지켜볼 생각은 못 했다. 방송을 본 뒤로 하루에 몇 차례씩 창밖을 살피게 된다. 이소라가 왜 새를 바라보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이렇듯 방송은 내 삶에 녹아들고, 내 삶과 연결되고, 나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어야 정을 주게 된다. 아니면 적어도 새로운 발견이라도 있어야 하고. 이소라·홍진경 또래의 연예인들이 유튜브에 도전했다가 별 반응을 얻지 못하고 그만두는 이유가 바로 '그땐 그랬지'에 머물기 때문일 게다. 이미 곰탕 우리듯 방송에서 숱하게 우려낸 이야기를 모처럼 마련된 자리에서 하고 또 하지 않나. 뭔가 새로운 시도라도 하면 좋을 텐데 과거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질 못한다.

<소라와 진경>은 오래 겪어서 남 같지 않아진 연예인들의 새로운 면을 꺼내 보여준다. 예를 들면 홍진경이 타고난 마른 체형이려니 했는데 예전에 글로벌 모델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후 체형에 대한 강박증이 생겼다는 거다. 이미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면이 있었구나 싶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프로그램의 매력이다. 한 가지 더, 스튜디오 장면에 개그맨 김원훈이 출연한다. 주로 상황극을 해온 터라 진행자 역할은 미지수였는데 전형적인 MC들과는 보법이 다르긴 하나 달라서 오히려 신선했다. 세대교체가 시급한 시기인 만큼 방송 관계자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쿠팡플레이 <봉주르 빵집>에 일을 도우러 온 '세븐틴'의 디노도 마찬가지다. 멤버들이 단체로 나오는 예능에서는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면면이 엿보였다. 건실하고 싹싹하고 눈치 빠르고 책임감 있고. 아르바이트가 처음이라는데 일머리가 있는지 어려움 없이 척척 해낸다. 김희애, 차승원 같은 대선배 앞에서도 기죽지 않되 예의를 잃지 않는다. 김희애와 대화할 때 슬쩍 마스크를 내린다거나 톤을 맞춰 조근조근 말한다거나. 특히 어르신들에게 살갑게 다가갈 줄 알아서 놀랐다. 방송은 이처럼 보석을 찾는 재미를 시청자에게 줘야 한다. 그런 장면이 화제가 되어야 옳고. 그러나 그와 반대로 갈등을 부추겨 화젯거리로 삼는 일이 너무나 잦다. 방송을 보며 욕이 나오게 만드는 건 출연자와 시청자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거다. 일종의 이간질이 아닌가.

TV조선 <조선의 사랑꾼>에 출연 중인 한윤서의 경우가 그렇다. 공개구혼 끝에 예비 신랑을 공개하고 축하를 받았으나 유튜브에서 과하게 술을 마시는 장면이나 전 남자친구와의 일화가 불씨가 됐다. 신랑 측 어머니의 반대가 있다는 설정, 상견례 자리에서의 기싸움, 급기야 부부 솔루션 프로그램을 방불케 하는 갈등까지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이 한윤서에게 도움이 될까. 인지도는 올랐을지 몰라도 보고 싶지 않은 연예인이 되어 가는 건 어쩔 것인가. 보석을 찾긴 찾았는데 깎는 과정에서 망친 예다.

어른들의 동화로 마무리된 JTBC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이 드라마만큼 보석을 많이 캐낸 작품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쉽지 않으리라. 명작을 가르는 기준 중 하나가 배우 본인의 이름보다 캐릭터 이름이 앞설 때라고 보는데 요즘 많이들 고윤정이 아닌 '변은아'라고 부른다. 구교환이 인생 캐릭터를 묻는 질문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방구뽕'을 꼽던데 이제는 당연히 '황동만'이지 않을까?

강말금의 '고 대표', 최원영의 '최 대표'는 물론이고 오정세에게 '박경세'도 인생 캐릭터일 게다. <동백꽃 필 무렵>의 '노규태'를 '박경세'가 순식간에 덮어버렸고, 박해준의 '관식'이는 '황진만'이 덮어버렸다. 한선화의 '장미란'을 두고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한목소리로 칭찬을 한다. 당분간은 tvN <술꾼 도시 여자들>의 '한지연'에 머물 줄 알았건만 이 복잡 미묘한 인물을 이토록 잘 소화해낼 줄이야. 성동일의 '노강식'도 놀라운 재발견이다. 모니터 위에 붙은 사진 한 장이 연기를 하지 않나.

그리고 배종옥의 '오정희'. 배종옥이 처음 눈에 들어왔던 드라마가 1995년작 KBS <목욕탕집 남자들>이었으니 30년 넘게 필력 좋은 작가들의 드라마에서 봐온 셈이다. 그럼에도 나에게 배종옥의 인생 캐릭터를 꼽으라면 단연 '오정희'다. 이렇게 많은 배우들에게 인생 캐릭터를 안겨준, 재발견을 시켜준 박해영 작가. 그야말로 배우들의 '추앙'이 이어지지 싶은데 작가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정석희 TV칼럼니스트 soyow59@hanmail.net

[사진=JTBC, MBC, 쿠팡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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