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로 부유해진 대만 경제의 그림자: 대만병과 거지 슈퍼맨 [딥다이브]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열풍을 타고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나라, 어디일까요. 한국이면 좋겠지만 아니고요. 바로 대만입니다. 주식시장 시가총액과 1인당 GDP(국내총생산) 같은 지표에서도 대만은 이미 한국을 추월했죠.
그런데 이상합니다. 나라가 이렇게 부유한데, 먹고살기가 팍팍하다는 대만 국민은 늘어만 가요.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이 갈수록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는 수출 기업 중심의 왜곡된 정책 탓이란 전문가 분석이 나오는데요. 오늘은 잘나가는 대만 경제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5월 29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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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호황인데, 내 지갑은 왜?
요즘 대만 경제엔 놀라운 소식이 가득합니다. 우선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무려 13.69%를 기록했어요(전년 대비). 지난해 연간 성장률(8.63%)도 대단했는데, 이건 뭐 경이적인 수준이죠. 1987년 이후 39년 만에 가장 높은 분기 성장률이라는데요. TSMC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성장을 이끌었죠. (참고로 한국 1분기 성장률은 전년 대비 3.6%)
2026년 대만의 1인당 GDP는 4만 달러를 돌파할 게 확실시됩니다. 이미 한국을 제쳤는데, 격차가 더 벌어지는 거죠. 동아시아 1위 자리를 더 굳건히 하게 됐고요.
주식시장은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이미 3년 연속(2023~2025년) 20% 넘는 상승률을 기록한 자취안 지수는 올해 들어서도 48% 올랐고요. 대만 증시 시가총액은 4월엔 캐나다, 얼마 전엔 인도를 제치며 세계 5위로 올라섰어요. 참고로 TSMC가 자취안 지수 시총의 42%를 차지하죠.

최근엔 TSMC 직원들이 성과급 때문에 동요한다는 소식이 나옵니다. 웨이저자 TSMC 회장이 “성과급 최소 30% 인상”을 약속했지만 불만은 가라앉지 않는다는데요. 이 역시 TSMC가 너무 잘나가서 생기는 현상이죠.
반도체가 만들어낸 대만 경제의 눈부신 성장.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데요. 이 놀라운 호황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를 체감하는 국민이 생각보다 적다는 점입니다. 최근 나온 여론조사 결과에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데요.
27일 발표된 포모사의 ‘5월 국민정치여론조사’ 결과를 보실까요. 현재 국내 경제상황이 좋다고 응답한 비율은 40.2%, 나쁘다는 응답은 55.1%에 달했어요. 이게 라이칭더 총통이 취임한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건데요. 특히 지방 거주, 30대, 고졸 학력에서 경제가 나쁘다는 응답이 많았습니다. 반면 타이베이시에 사는 고학력자는 경제가 좋다는 응답 비율이 더 높았고요.
3월 나온 대만 취업포털 ‘예스123’의 설문조사 결과도 의외였는데요. 39세 이하 대만 직장인 중 약 40%가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재정적자를 겪고 있다고 응답했어요. 또 23%는 모아둔 저축이 아예 0이고, 72%는 현재 빚을 지고 있다고 답했고요. 무엇보다 무려 54.9%가 스스로를 “인생의 실패자”라고 여긴다는 우울한 답변을 내놨죠.
계란 껍질로 밀려나는 청년들
정리하자면 경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그 온기를 체감하지 못하는 국민이 너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역대급 호황을 주도하는 건 반도체 산업이고요. 거기에 속한 일부 선택받은 이들만 그 과실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죠.
TSMC를 포함한 반도체 산업은 대만 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데요. 이 분야의 고용인원은 고작 30만명. 대만 전체 노동자(1100만명)의 3%가 채 안 되죠. 범위를 IT 제조업으로 넓혀 잡아도 고용인원은 총 100만명 정도인데요. 서비스업이나 전통 제조업에서 일하는 나머지 90% 이상의 근로자엔 이 AI 붐이 딴 세상 이야기일 뿐입니다.
이를 실감할 수 있는 통계가 있는데요. 대만 경제가 그렇게 잘 나가고 1인당 GDP는 4만 달러라는 데도, 대만 통계청이 집계한 근로자 평균월급은 고작 4만6000대만달러(220만원)에 그쳤어요. 한국(월 383만원)의 60%에도 못 미치는 거죠. 중위 임금(일렬로 세웠을 때 가운데 수치)은 3만8000대만달러(182만원)으로 더 낮고요. 그나마 이게 지난 10년 동안 최저임금을 꾸준히 올려서 이 정도라는데요. 사실 대만은 한국보다도 평균 노동시간이 연간 100시간 이상 더 긴, 세계적으로 오래 일하기로 유명한 나라이거든요. 일은 많이 하는데, 손에 쥐는 건 보잘 것 없다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대만은 물가가 싸니까 먹고살만 하지 않냐고요? 예전엔 그랬죠. 하지만 최근엔 이야기가 좀 달라졌습니다. 물가, 그 중에서도 특히 집값과 임대료가 유독 말도 안 되게 뛰었거든요.
우리가 흔히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라고 하면 홍콩을 떠올리는데요. 수도 타이베이의 최근 중위소득 대비 주택가격 비율은 15.41배로, 이미 홍콩(14.4배)을 넘어섰어요(참고로 서울은 13.9배). 보통의 근로자가 소득을 한 푼도 안 쓰고 15.41년 동안 모아야 겨우 집 한 채 장만한단 얘기죠. 이게 2년 전엔 16배였는데, 그나마 대만 정부가 부동산 규제를 강화하면서 좀 낮아진 겁니다. 한마디로 미친 집값이죠.
이제 타이베이는 물론이고 수도권에서는 웬만한 직장인 월급으론 집 사는 게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대만 주택시장에선 ‘계란 노른자 구역(타이베이 핵심지)’과 ‘계란 흰자 구역(주변 위성도시)’이란 표현이 흔히 쓰이는데요. 요즘엔 흰자도 아닌 ‘계란 껍질 구역’에 집을 얻는 젊은층이 늘어갑니다. 인프라가 열악하고 도심 접근성이 떨어지는 변두리로 밀려난 거죠.
타이베이에 원룸이라도 얻으려는 사회 초년생이라면 부담은 더 큰데요. 대졸 초임(반도체 기업이 아닌 경우)은 약 3만5000대만달러(167만원)에 불과한데, 도심 원룸은 아무리 작고 낡은 방도 월 1만5000대만달러(70만원)은 줘야 해요. 월급 받아 월세 내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죠.

왠지 좀 짠한데요. 한 푼이라도 아끼려면 어쩔 수 없죠. 지난해 한 네티즌은 1년간 편의점 할인식품을 구매하면서 모은 스티커 364장을 빼곡히 붙인 ‘2025년 거지슈퍼맨 기록부’를 스레드에 공개했더군요. 이렇게 해서 1년 동안 절약한 금액이 1만688대만달러(52만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왜 요즘 대만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지 알 것만 같죠. 대만의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695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어요. 저출산 순위에서마저 한국을 제친 거죠.
수출 기업을 키우기 위해 국민이 치른 대가
혹시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빈부 격차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양극화가 심화하는 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잖아?
그런데 여기서 꼭 해야할 질문이 있습니다. TSMC를 포함한 대만 반도체 산업이 이룬 놀라운 성공이 오로지 기업과 임직원의 역량으로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해 대만 국민이 감수해야 했던 희생과 부담은 없을까요.
바로 이 점을 지적해 큰 화제가 됐던 책이 있습니다. 4명의 대만 경제학자가 2021년 공동집필한 ‘치부의 특권(부자가 되는 특권, Privilege of Wealth)’인데요. 부제(지난 20년간 우리가 중앙은행 정책에 치른 대가)에 나와 있듯이 대만 중앙은행의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한 책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대만 중앙은행은 수출 대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대만 달러의 통화가치를 낮게 유지(평가절하)하는 정책을 펼쳐왔어요. 이에 따라 경제성장률이나 물가상승률과 비교해 비정상적으로 낮은 초저금리를 고수했고요. 중앙은행이 찍어낸 돈으로는 미국 달러를 왕창 사서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쌓았죠(대만 외환보유액은 세계 6위로 12위인 한국보다 훨씬 많음).
통화가치를 낮추면 기업은 해외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을 높일 수 있죠. 이런 중앙은행 정책이 수출 대기업엔 정부가 주는 일종의 보조금 혜택으로 작용했어요. 반면 수입물품을 사야 하는 일반 소비자엔 추가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같았죠. 사실상 가계의 자산을 기업으로 이전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요.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장기간 초저금리로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으로 쏠린 거죠. 살인적인 집값 폭등을 야기해서 국민의 삶의 질을 무너뜨리고 출산율까지 떨어뜨린 그 주범. 따져보면 바로 수출 기업 밀어주기에 올인해온 중앙은행이었던 셈입니다. 국민을 가난하게 만들면서 대기업을 키워주는 왜곡된 정책이 이런 부작용을 낳은 거죠. 이 현상을 설명하면서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를 “‘대만병’ 또는 ‘포모사 독감’이라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요.

물론 대만 중앙은행은 인위적으로 통화가치를 낮게 유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진 않아요. 아니, 할 수가 없죠. 그랬다간 ‘환율조작국’으로 찍힐테니 말이죠. 하지만 빅맥지수로 유추했을 때 대만달러는 그 어느 주요국 통화보다도 가장 저평가돼있는 건 사실이고요(미국 달러 대비 59.6% 저평가). 지난해 8.63%라는 놀라운 GDP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2년 넘도록 기준금리는 2%로 동결 중입니다.
‘치부의 특권’이 출간된 지 5년이 지났지만 통화가치 절하와 저금리라는 정책 기조는 여전히 달라진 게 없죠. 역대급 경제성장에도 국민의 삶은 쪼들리는 모순이 해결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과연 대만 경제는 그동안의 성공공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대만병을 치료할 결심을 할 수 있을까요.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5월 29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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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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