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도 못 읽겠다는 알파벳 판결문‥내란범도 A, B, C [서초동M본부]

윤석열 전 대통령, 김용현 전 국방장관 등 12·3 내란 사태 핵심 인물들의 내란 혐의 1심 판결문 일부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이해되십니까? 원래의 판결문은 이렇습니다.

'피고인 윤석열의 소집 지시를 받은 국무위원 등이 대통령실 5층 대접견실로 모이고 있었는데, 피고인 김용현을 비롯하여 법무부장관 박성재, 행정안전부장관 이상민, 통일부장관 김영호, 국무총리 한덕수, 외교부장관 조태열, 국가정보원장 조태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최상목, 대통령비서실장 정진석, 국가안보실장 신원식, 농림축산식품부장관 송미령, 보건복지부장관 조규홍이 도착하였고, 2024. 12. 3. 22:16경 중소벤처기업부장관 오영주가 도착함으로써 국무회의 구성원 11명이 모이게 되었다.'
위 상황 뒤로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고작 2분가량 진행된 '하자 있는' 국무회의가 이어집니다. 재현되지 말아야 할 역사의 한 장면이지만, 알파벳에 가려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조차 없는 암호문으로 기록됐습니다.
대법원이 재판예규를 통해 비실명화 기준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주민번호, 연락처, 계좌번호, 신용카드번호 등 금융 정보는 물론 판결문상 성명과 명칭은 원칙적으로 모두 비실명 처리됩니다. 알파벳을 사용하도록, 또 가려야 할 정보가 많은 경우 두 개까지 붙여 쓸 수 있게 했습니다.

판결문에는 본래도 법률 용어와 압축된 사실관계가 들어차 있습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고유명사가 죄다 알파벳으로 바뀌어 있으니, 누가 누구인지 짚어가며 내용을 따라가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판사들은 법원 내부 시스템을 통해 등록된 판결문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비실명화 조치를 거치지 않은 판본입니다. 법원행정처에 근무하거나 공보판사를 맡는 등 사법행정 업무를 경험하지 않는 한, 익명 판결문에서 오는 불편함을 겪는 일이 드뭅니다. 그래서 종종 사건 당사자들이 낸 기록 등에서 익명 판결문을 맞닥뜨릴 때 놀란다고 합니다. 어느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과거에 관여했던 사건이었는데도 이를 알아차리는 데 한참 걸렸다"고도 했습니다.
법원은 이미 예외를 만들어 왔습니다.
일반인이 사본을 받아볼 수 있는 판결문은 확정된 형사 사건과 민사 사건입니다. 그런데 12·3 내란 사태의 경우, 서울중앙지법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1심 판결문을 홈페이지에 게시했습니다. 다른 미확정 형사 판결문들도 '주요 판결'이라는 이유로 여럿 올려져 있습니다. 무죄 추정 원칙,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들며 꺼렸던 공개 자체도 사실은 법원의 재량 영역에 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실명화 기준 또한 일률적 원칙으로 적용할 것인지, 사건에 따라 예외를 둘 것인지도 논의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비실명화 작업에 쓴 세금은 지난해 37억 8천2백만 원입니다. 재작년 32억 8백만 원에 이어 또 늘었습니다. 내후년에는 수요가 급증할 것입니다. 국회가 법을 개정해 2027년 말부터 형이 확정되지 않은 형사 하급심 미확정 판결문도 공개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법원행정처는 기획예산처에 내년도 예산 요구안을 제출하면서, 판결문 익명화 프로그램 개선을 위한 예산 증액을 요청했습니다. 재정당국이 인건비 감축을 요구해 왔는데, 프로그램의 수준을 높이면 사람을 덜 써도 된다는 계산입니다.
비용 절감 차원으로만 본다면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요즘같이 고도화된 인공지능을 누구나 손쉽게 쓰는 때에, 법원 역시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와 함께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대해, 행정처 내부에서는 적어도 하급심에서 상급심까지 부여한 알파벳을 동일하게 하는 게 필요하지 않느냐는 제안도 있었다고 합니다. 1심에서 A였던 인물은 2심에서도 A인 식입니다.
하지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비실명화 기준 자체에 대한 논의가 우선이지 않을까요.
법원 내부에서는 의견이 갈립니다. 특히 형량과 같이 판사의 재량이 보다 허용되는 영역에 관해, 일명 '판사 프로파일링'이 이뤄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어느 판사가 범죄의 종류나 피고인의 유형에 따라 형의 무겁고 가벼움을 달리한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변호사들 사이 알음알음 돌았습니다. 그 소문을 측정 가능한 수치로 만드는 것입니다.
최근 사법정책연구원이 연 세미나에서 한 발표자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형사 피고인이든, 민사 사건 원고이든 재판부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공개된 판결문을 바탕으로 한 프로파일링 서비스가 이용자들의 '재판부 쇼핑'으로 이어질지 의문이다. … 같은 법원에 근무하는 법관들이 같은 경향을 갖는 것도 아니다. 현재 실무상 당사자의 신청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부가 타 재판부로의 사건이송을 쉽게 결정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김구열 법무부 법무심의관실 검사)
일반인이 알파벳 판결문이 아닌 실명 판결문을 열람할 수 있는 곳은 딱 한 군데 있습니다. 경기 고양 법원도서관입니다. 필기구나 각종 전자기구는 반입이 금지되고 사건번호만 적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정보 유출로 인해 법원에 문제 제기가 이뤄지자, 대법원에서는 아예 이 제도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고 합니다. 담당자에 대한 면책 조항이 생겨야 하는 것은 맞지만, 공개 확대 흐름과는 상반됩니다.

시민단체 참여연대는 최근 서울중앙지법이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의 내란 1심 실명 판결문 정보공개청구를 거부하자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다음 달 첫 변론이 열립니다.
헌법 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을 공개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공판(公判)'의 앞 글자 '公'은 '공개(公開)'의 앞 글자이기도 하죠. 알파벳 비실명화 예규는 '재판 공개'라는 헌법 원칙을 지키는 과정에서 개인정보 노출이나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수단이지 헌법에 앞서는 규정은 아닙니다.
볼 수 있는 판결문의 범위는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개된 판결문이 정작 읽히지 않는다면 과연 공개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대로라면 내란 우두머리 재판의 확정 판결이 나와도, 사법부가 기록으로 남긴 그날의 사실관계와 판단은 알파벳 뒤에 가려집니다.
▶ 관련기사 윤석열은 E씨? 수십억 예산 '판결문 비실명화' 이대로 괜찮을까https://imnews.imbc.com/replay/2026/nwdesk/article/6825710_37004.html
유서영 기자(rsy@mbc.co.kr)
기사 원문 - https://imnews.imbc.com/newszoomin/newsinsight/6826360_291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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