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챙긴 속옷 하나 열 근육 안 부럽다[한끗 차이]

남성 패션지에서 함께 일했던 후배 남자 에디터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요점은 위고비와 마운자로로 살을 잔뜩 뺐더니 어떤 옷이든 소화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몸에 착 달라붙어 실루엣이 드러나는 티셔츠에, 금세라도 벗겨질 듯 장골 라인이 도드라지는 청바지까지 모두 소화 가능하다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얼마 뒤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번 대화의 주제는 뷰티였다. “선배는 파운데이션 어떤 거 써? 치크는 뭘 쓴 거야?” 20대 시절 갓 소녀에서 벗어난 여자 친구들끼리의 대화 이후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그는 기초와 크림 제품의 영역을 지나 피부 메이크업 아니, 색조까지 관심을 보이며 갖가지 제품들을 테스트 중이라고 했다. 그루밍 따위엔 일말의 관심도 없던 그에게 지난 10여년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간을 거슬러 2012년 밀라노 구찌 쇼 현장이 떠올랐다. 레이스, 플라워 패턴, 실크 소재, 유연한 실루엣, 파스텔 톤 컬러 등 여성복인지 남성복인지 ‘아리까리한’ 의상들이 런웨이를 오갔다. 여성의 것이라 치부되었던 것들을 남성 아이템에 적극 반영한 것. ‘젠더리스’라는 단어가 패션계의 화두로 떠오른 시점이다. 남자의 디테일도 여자의 것이, 여자의 디테일도 남자의 것이 될 수 있는, 남녀의 경계를 나누지 않은 트렌드 말이다. 쇼의 피날레 무렵, 수많은 눈은 모두 ‘아름답다’는 공통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도대체 남자의 것이란 누구의 판단으로 생겨난 것일까.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그 어떤 조건도 없는 ‘궁극의 아름다움’은 아닐까. 그것은 남녀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 아닐지.
이런 기류들은 10여년을 지나 이미 현실 전반에 깊숙이 반영되고 있다. 당시엔 ‘젠더리스’라 불렸던 이 흐름은 이제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라는 이름으로 더 깊고 넓어졌다. 나의 오랜 남자 후배처럼 말이다.
성별 경계 넘은 패션·뷰티 흐름
‘젠더리스’서 ‘젠더 플루이드’로
남성 보정 속옷 여름에 더 주목
엉덩이 패드로 하체 라인 살려
운동 없이도 ‘뒤태 미남’ 변신

패션을 넘어 이미 남성 뷰티 시장은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패션과 뷰티에 이어 현재 그 범위를 늘리고 있는 분야가 바로 ‘체형 교정 속옷’이다. 영국 가디언의 기사에 의하면 흔히 ‘보정 속옷’이라 불리는 ‘남성 셰이프웨어(male shapewear)’ 의 검색량이 2024년부터 약 40% 증가했다고 한다. 그만큼 남성 체형 속옷의 관심도가 높아지고 소비자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의 ‘체형 교정 속옷’이 오롯이 여성의 영역이었다면, 지금은 다르다. 남성용 체형 교정 속옷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복부와 허리를 잡아주는 ‘웨이스트 트레이너’, 등과 어깨를 펴주는 ‘자세 교정형 언더셔츠’, 그리고 허벅지와 엉덩이 라인을 정돈해주는 ‘하프 팬츠형’ 제품이다. 글로벌 시장에선 이미 SKIMS, Sculpme, Sculptees 같은 브랜드들이 남성 라인을 적극 확장하고 있고, 국내에서는 바디킹, 네오바디 등 관련 제품의 출시가 늘고 있다.
그중 ‘엉뽕 팬츠’라 흔히 (조롱을 섞어) 불리는 ‘하프 팬츠형’은 여름이 오면 더 주목받는다. 여성들의 패드 브라나 힙업 속옷 등이 몸매를 드러내는 여름에 판매량이 늘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엉덩이 보정 속옷은 패드를 삽입해 빈약한 엉덩이 볼륨을 살려주기에, 어깨·허리·엉덩이로 이어지는 라인이 또렷해지며 운동을 꾸준히 한 몸처럼 보이게 한다. 특히 바지 핏을 살려 뒤태 미남으로 ‘기분 좋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러운 볼륨감이 생기는 건 덤이다.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슬림 슬랙스와 스트레이트 데님을 입는 것이 좋다.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좁아지는 라인이 엉덩이 볼륨을 더욱더 도드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블루종과 같이 재킷을 짧게 입는 것을 권한다. 기껏 정성 들인 엉덩이 라인이 가려지지 않게.
와이드 팬츠나 카고 팬츠, 얇은 소재의 바지는 피할 것. 통이 넓으면 엉덩이 라인이 살지 않고, 주머니와 디테일이 많은 바지는 시선을 분산시킨다. 특히 얇은 소재는 패드 윤곽이 비치는 대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
여성의 보정속옷은 ‘자기관리’이고 남성의 것은 ‘허세’ 혹은 ‘이상함’이 되는 이 이중 잣대야말로, 우리가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편견의 흔적이다. 공작의 형형색색 날개도, 사자의 얼굴을 감싸고 있는 볼륨감 넘치는 갈기도 암컷이 아닌 수컷의 것이다. 중세시대의 남성복은 레이스와 현란한 패턴, 겹겹이 레이어드 등으로 극히 화려했다. 화려했던 남자들의 그 시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유연한 마음으로 젠더 플루이드의 시대를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남자들의 한껏 ‘업’된 엉덩이가 실체가 아니어도 실망하지 말기를.
정소영 패션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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