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 회고록] 이승만 하야 뒤에도 아버지는 내내 경찰의 사찰 대상이었다


1960년 늦은 봄, 나의 안의 생활은 단 두 달 만에 막을 내렸다. 아버지가 이룬 새 가정의 정규 식솔이 되겠다는 나의 꿈은 처참히 무너졌다. 아버지가 교장 자리에서 축출당한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안의를 떠났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을 도모해야만 했다. 우리는 안의 이후로 전 가족이 함께 침식을 나눌 기회가 없게 되었다.

29년 후 나는 안의를 다시 찾았다. 1989년 여름 방학을 맞아 나는 혼자 자동차를 몰아 안의에 들렀다. 이즈음 나는 또 하나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새 삶을 설계하기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은 과거와 맞닥뜨리는 일이었다. 그것은 의식에서나마 아버지의 세계를 내 삶에서 영원히 격리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안의중학교 교정을 오르는 길에 단아한 신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29년 동안 내 기억 속에 살아있던 박용봉 선생이었다. 새색시처럼 수줍던 총각 선생님이 이제 교장 선생이 되신 것이다. 활짝 맞아주셨다. 가을에 두 차례 더 들렸다. 내가 기억하던 유일한 동급생 박영학을 찾았다. 영학은 새어머니의 친척이기도 하여 대학 시절에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다. 선배 교수를 동행한 길에 면장 송경영이 화림동 농월정 계곡에서 '월광주(月光酒)' 연회를 열어 주었다. 하영빈 교감 선생은 신기하게도 내가 심취해 있던 미국 연방대법관 윌리엄 더글라스를 알고 있었다. 몇 차례 안의 나들이 끝에 나는 짧은 글을 썼다. 〈안의별곡〉이라 제목 붙였다.
소박한 시골 친구들은 가슴을 활짝 열어주었다… '교장'이라는 권력자의 아들이 아니라
유난히 몸이 작은 외로운 이방인 소년에 대한 연민의 정을 베풀어 주었다. 우리는 어울려 초등학교 운동장에 전시된 부서진 미군 탱크 위에 올라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노래를 외치는가 하면 시오리 길을 멀다 않고 달리다시피 걸어 화림동 계곡 시린 물에 풋고추를 담그기도 했다. 광풍루는 우리의 연회장, 밤숲은 우리의 사냥터, 우리는 자연과 문명을 동시에 다스리는 왕자들이었다. 그들은 지극히 민주적인 절차로 이방인 소년을 그들의 대표자의 일원으로 선출해 주기도 하고 그의 조그만 견문과 지식에 감동해 주기도 했다. 향교 앞 작은 시내 위에 걸친 구름다리 한가운데에 가두어 놓고 양끝에서 발을 굴려대면서 소심한 서생의 담력을 시험해 보는 등, 짓궂은 장난을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확인하곤 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결코 악의가 없는 동류로 받아주는 의식에 불과했다. 실로 나는 안의를 사랑했다. 소년소녀 명작 소설을 파는 서점도 아란 랏드나 게리 쿠퍼의 권총 솜씨에 넋을 잃을 영화관도 없는 곳이었지만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순하디 순한 누른 이빨의 할머니 빨래 방망이 소리에 나는 행복했다. 이곳이야말로 내 작은 육신과 어린 영혼을 송두리째 묻을 곳이라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내 작은 소망과 결연한 다짐은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유월 어느날 새벽 첫차로 아버지와 나는 안의를 떠났다. 광풍루에서 다리를 건너 거창과 함양으로 갈라지는 분기점 삼거리에 이르기까지 도로 양변에 도열해 서서 작별의 경례를 보내는 고등학생들을 뒤로 한 채, 그 복잡한 정치와 어른의 세계를 알지 못하면서도 나는 뭔가 내가 사랑한 이 땅에, 소박한 시골 친구에게, 누런 이빨의 할머니에게, 한 차례 짖어대다 이내 꼬리 내리기 바쁜 겁 많은 토종개에게, 우러러 보던 선생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서러움에 계집애처럼 울었다. 산길 수백 리 달린 버스가 대구에 이르기까지 몇 시간을.
아버지는 그 후로 10여 년을 더 사셨지만 결코 안의의 꿈을 재생시키지 못했다. 안의는 당신의 마지막 무대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걸면서 나의 인생 깊숙이 잠입하려고 했다. 나는 어두운 환영으로 싸인 아버지의 세계에서 탈출해야만 했다. 물질적 유산을 도덕적 열등의 징표로 추정했듯이 아버지의 잿빛 우울로부터도 나는 해방되고 싶었다. 나는 나의 역사는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아담 콤플렉스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끊임없이 다짐했다. 안의는 나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비극이지 나의 비극은 결코 아니라고. 나는 아버지의 희귀한 체험과 소모적인 낭만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당신의 방황의 편력이 나의 인생에 스며들까봐 조바심을 내면서 십여 년을 버티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14년, 부자가 안의에서 쫓겨난 지 29년 후 나는 기어코 안의를 찾았다. 안의는 그냥 그 자리에 있었다. 금호강은 아직도 알몸을 훤히 드러낸 채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잔잔한 물결 위에 유난히도 살결이 희던 여선생님의 잔향이 물씬거렸다. 새색시같이 수줍던 총각 선생님의 웃음은 이제 인자한 교장이 되어 이마에서 빛났다. 십여 년 외항선원 생활 끝에 고향을 뒷바라지하는 개구쟁이 친구의 게걸스러운 웃음은 독서실에서 돌아온 아들놈의 눈가에 전승되고 우물가 매화꽃을 수병풍에 옮긴 살가운 아내의 눈언저리에 빛난다. 가슴 졸이며 한 알 서리하던 산수유의 떨떠름한 맛은 옛날 그대로 육류와 버터에 오염당한 세 치 혀를 감싸고 돈다.
안의는 나를 소년시절 반 백일 머물다 떠난 초립(草笠) 과객이 아니라 향토사에 작은 파문을 던졌던 한 풍운아의 아들로 기억해 줄 곳, 그를 쫓아낸 정치도, 사상도, 권세도, 지역감정도 조용히 흘러가는 금호강에 띄워 보낸 채, 오백여 년 풍상에 씻겨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황석산 피바위의 핏자국이나 되듯 29년 응어리진 내 핏덩이는 농월정 암상을 질주하는 청류가 용해시킨다. '역사는 단절이 아니고 연속이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곧 아름다워진다.'라고 꾸짖으며.

상시 사찰 대상자
4288(1955)년 8월 5일 자로 서울시 경찰국장 이사관 변OO의 이름으로 작성된 〈사찰요람〉이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단주유림기념사업회 김영천 소장이 입수한 것이다. 영남학회-김상현(金相現), 안의고교 교사 안병준, 김영두(金永斗, 공작원), 신순남, 김두한(현 민의원, 대한건설단) 유치진, 유치환 등 인물들이 지속적인 사찰 대상자로 기재되어 있다. 모두가 '독립노농당' 당원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김상현은 하기락교수의 애제자이자 내 이모부이기도 했다. 20대에 두각을 나타낸 청년 학자였는데 하룻밤에 갑자기 서거하여 청상이 된 내 이모의 인생이 복잡하게 되었다.
독립노농당의 내부 문서와 김용관(1931-2020) 선생의 증언도 사찰보고서 내용과 일치한다. 독립노농당의 문서에 의하면 당은 1952년 10월 3일 경북지구 특수위원회를 조직한다. 조직부에 아버지의 이름이 등장한다. 당시 경북대학교 학생이던 김용관 선생은 "어쩌다 인민군 경력을 가졌지만 본시 우리 쪽 사람"이었다며 아버지를 보좌하라는 당수 유림의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김 선생은 1970-71 기간 동안 아버지가 고향에서 밤나무단지 조성 사업에 투신했을 때 함께 산판에서 동거했기에 특별히 애틋한 기억을 갈무리하고 계셨다. 만년에 투병하면서도 나를 만나면 굳이 술잔을 권하는 여유를 과시하면서 왕년의 결기를 과시하곤 했다.
이승만 정권 이래 아버지는 언제나 경찰의 사찰 대상이었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에도 경찰의 사찰은 이어지고 있었다. 하루는 지나가던 나를 다리 옆 검문소의 경찰이 불러 세웠다. 나를 검문소 안으로 들어오게 하더니 찐빵을 하나 내밀었다. 그리고는 "요즘 네 아버지 어딜 나들이하느냐? 집에서 정치 이야기는 안 하느냐"고 다그쳐 물었다.
실은 그즈음 아버지는 은밀하게 서울 나들이를 했다. 양일동(1912~1980)선생을 만났다는 후일담도 있다. 현곡(玄谷) 양일동 선생은 한때 단주(旦洲) 유림(柳林)의 추종자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헌신했던 분이다. 아버지는 양일동 선생을 만나 곧 시행될 선거에 함양에서 출마할 것을 상의했다고도 한다.
이듬해인 1961년 4월 1일, 유림이 급서한다. 수유리에 조성된 유림의 묘역이 이례적으로 넓은 것은 당시 집권당의 원내총무였던 양일동의 남다른 배려가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매년 4월 1일 단주유림기념사업회 김영천 소장의 주도 아래 추모식이 열린다. 나도 10여 년째 참석하고 있다. 현곡 선생의 묘소도 인근에 조성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유림과 기일이 같다. 유림이 타계한지 19년 후인, 1980년 4월 1일, 현곡은 존경하던 선배의 뒤를 따랐다. 나도 유림의 묘소에 들릴 때면 몇 백 미터 산 위쪽에 자리한 현곡의 묘소도 함께 참배한다. 얼마나 더 이 연례행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안경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전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