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고단한 젊음의 초상…“그래도 연극은 웃겨야 돼요”

유주현 2026. 5. 30.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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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미미의 미미한 연애’ 강훈구 연출가
‘영어덜트 연극’을 표방하는 극단 공놀이클럽의 강훈구 연출. 최영재 기자
“널 때렸지, 날 때렸니?”

객석에서 탄식이 새어 나온다. 딸에게 폭력을 휘둘러 오래전 이혼한 남편이 그립다며 집을 나가는 엄마라니. 하지만 아동학대 트라우마에 갇혀 살던 ‘미미’의 등을 문밖으로 떠민 건 역설적이게도 이런 상식 밖의 엄마다.

우울한데 엉뚱해서 웃음이 터지고, 연극적인데 현실적이라 마음 아프다. 극단 공놀이클럽이 22일 막을 올린 신작 ‘미미의 미미한 연애’ 얘기다. ‘영어덜트 연극’을 표방하며 요즘 청년들의 속사정을 속사포 호흡으로 무대에 펼쳐내고 있는 강훈구 연출. 지난해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으로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을 수상한 이후 가장 핫한 연극인이 됐다. 각색에 참여한 두산아트센터 기획 연극 ‘원칙’이 27일 개막했고, 상반기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연극내일프로젝트를 시작으로 하반기 서울시극단, 국립극장과의 협업 등 공공기관 러브콜을 한몸에 받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미디어 교육 연극 ‘점프X컷’ 연출도 맡았다.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 [사진 공놀이클럽]
“또래들과 공놀이하듯” 연극을 시작했다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꽤 묵직하다. ‘미미의 미미한 연애’도 보건복지부 추산 ‘고립·은둔 청년 54만 명 시대’라는 무거운 사회적 통계를 바탕으로 청년실업, 가정폭력, 주거문제 등 청춘들이 안고 있는 현실을 저글링하는 솜씨가 과연 ‘연극계 뇌섹남’답다. 올해 마포문화재단이 공놀이클럽을 상주단체로 선정해 개발한 신작으로 마포아트센터 공연(6월 3~7일)에 앞서 대학로에서 먼저 공개했다. “대학로에서 일단 소문내고 마포로 가려는 전략이죠. 우연찮게 제가 2017년에 작가로, 2019년에 연출로 데뷔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신인작가를 데뷔시키게 됐네요.”

‘미미의 미미한 연애’는 23세 조민송 작가와 2년에 걸쳐 함께 개발한 작품. 대학 강의를 나갔을 때 연극을 하고 싶다며 찾아온 학생이 내민 짧은 습작이 신선했단다. ‘말린 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도 서동민 작가의 데뷔작이었고, 민간 신분으로 드물게 ‘안착한 청소년극 페스티벌’이라는 신작 개발 사업도 하고 있으니 ‘작가 머리올려주기’ 사명이라도 있는 걸까. “신춘문예 응모자가 두 배로 뛰었다죠. 작가 지망생이 정말 많고, 저도 작가 출신이라 그 현실이 얼마나 열악한지 알거든요. 모든 게 작가로부터 시작되는데, 신작을 개발해주는 과정은 거의 없고 연출가 중심으로 돌아가는 데 열받아 연출을 시작했고, 저라도 신작 개발 모델을 만들고 싶었어요. 생각보다 힘들긴 하네요.(웃음)”

‘미미의 미미한 연애’. [사진 공놀이클럽]
요즘 청년들의 자화상을 깨알처럼 발견하는 무대다. 집나간 남자친구를 찾아 화장품 방문판매에 뛰어든 미미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트라우마를 극복해가는 여정에, 타인과의 관계맺기에 서툴러지고 가족의 개념도 달라지는 현재가 빤히 드러난다. “신인작가들의 작품에 주인공의 목표가 희미한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애인을 찾겠다는 욕망이 뚜렷해서 ‘타인을 이해해 보자’는 쪽으로 방향성을 잡았어요. 현실에서는 우리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구분 짓고 살지만, 연극에서만이라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한발짝 다가가보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특이해 보이지만 ‘이혼숙려캠프’에 흔히 나오는 현실적인 모습이죠. 딸 걱정만 하고 사는 엄마는 클리셰일 뿐 딸의 독립을 추동하지도 못한다고 봤어요.”

무대가 비추는 현실의 무게를 날려버리는 건 코믹한 대사들. “공포영화를 굳이 왜 찾아서 봐. 도태되는 이 삶이 공포인데” “비 온 뒤에 땅이 굳고, 화장품은 뚜껑을 열어놓으면 굳는다”는 리드미컬한 언어유희에 빵빵 터진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웃겨야 된다고 생각해요. 심각한 이야기에 너무 빠져들지 않게, 멀리서 볼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장치가 웃음이잖아요. 못 웃길 때 제일 속상해요. 애초에 연극을 좋아한 이유도 다같이 웃을 수 있는 공간이라서였거든요.”

강 연출은 고려대를 나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극을 배웠다. 고교시절 영화를 동경했지만 이웃 여고와 영어연극 연합동아리를 하며 맛봤던 연극의 즐거움이 여기까지 끌고 왔다. “제가 자란 경주에 강우석 감독님이 운영하는 대왕시네마라는 극장이 있었어요. 거기 걸리는 모든 한국영화를 보며 로망을 품었죠. 감독님들이 다 서울의 좋은 대학을 나왔길래 저도 공부를 열심히 했고요. 막상 기회가 왔을 때 제 호흡과 안 맞는단 걸 알았어요. 연극은 제가 쓴 대본을 1년 안에 다 올릴 수 있지만, 영화는 계약해놓고 기다리다가 엎어지는 일이 부지기수죠. 저는 절대 황동만같은 사람은 못될 것 같아요.(웃음)”

영화도 AI가 만드는 시대일수록 연극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한다. 프로들이 하는 엘리트 연극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할 만 한 게 연극이라서다. ‘안착한 청소년극 페스티벌’ 등 자신의 프로젝트에 시민과 청소년을 적극 끌어들이는 이유다. “누구든 소자본으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게 연극이잖아요. 숙련된 서커스같은 작품도 좋지만, 각자의 삶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들을 이야기할 공간으로서의 극장도 필요하거든요.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깨는 재미도 있죠. 유럽에 가보면 지역 중심에 극장이 있고, 사람들이 모여서 연극을 만드는 문화가 있잖아요. 우리나라도 지역의 극장들이 그런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유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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