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권리’ 이전에 ‘돌봄받을 권리’를

이에스더 2026. 5. 30.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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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
박혜윤·신성준·최은경 지음
아몬드

2022년 국회에서 의사조력자살 법안이 발의됐을 때, 논의 표면에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서울대병원 윤영호 교수팀 조사에서도 국민 76.3%는 안락사 혹은 의사조력자살 입법화에 찬성했다. 하지만 그 숫자를 곧바로 제도 도입의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 찬성하는 배경에 ‘남은 삶의 무의미’ ‘좋은 죽음에 대한 권리’ ‘고통의 경감’ ‘가족 고통과 부담’이 깔려 있어서다. 의사조력자살을 원한다는 목소리는 죽음을 향한 적극적 선택이라기보다, 한국 사회의 생애말기 돌봄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보여주는 신호일 수 있다.

책은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마지막은 덜 고통스럽고, 덜 초라하고, 덜 폐 끼치는 방식이기 바란다. 그러나 “고통 없이, 내 뜻대로, 존엄하게 죽고 싶다”는 말의 밑바닥에는 제대로 돌봄받지 못한 채 병원과 가족 사이에 놓인 환자들의 현실이 있다. 자의와 무관하게 이어지는 연명의료, 가족에게 떠넘겨지는 간병, 제한적으로만 닿는 호스피스·완화의료, 환자와 가족을 지치게 하는 비용과 외로움이 있다.

이 책은 단순 찬반 논쟁 대신 안락사, 존엄사, 조력자살, 의사조력임종을 하나씩 짚고 네덜란드·캐나다·미국·스위스·대만 등의 사례를 통해 제도가 작동하는 사회적 조건을 살핀다. 법 제정보다 중요한 건, 그 법이 누구에게 어떤 선택지로 다가갈지 따지는 일이란 점을 보여준다.

책이 가장 경계하는 건 ‘깨끗한 죽음’이라는 말의 매혹.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스스로 통제하며, 고통 없이 떠나는 죽음은 듣기에는 이상적이다. 그러나 그 말이 돌봄의 실패를 가리는 언어가 될 때 문제가 생긴다. 충분히 돌봄받지 못한 사람, 가난과 간병 부담에 지친 사람, 외로움 속에 삶을 접고 싶은 사람이 조력임종을 ‘선택’한다면 자유로운 자기결정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 책은 죽을 권리를 말하기 전에, 마지막까지 인간답게 돌봄받을 권리가 보장되고 있는지 묻는다. 한국 사회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죽음의 문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그 문 앞까지 가는 길을 덜 고통스럽고 덜 외롭게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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