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농업 미래를 일구다] 땅·자본 없던 청년 셋, 함께 농사짓자 휴가도 생겼다
프랑스 ‘가엑 라 리브 페이잔’
은퇴농가 폐업 농장 빌려 출발
농지 같이 쓰고 수익 공동배분
채소·곡물·축산 각자 맡아 경영
분뇨·짚 자원화 순환농업 실천
영농비용 줄이고 시간 여유까지

“혼자 농사지을 땐 늘 밭에 매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가 달라졌습니다.”
4월15일 오전, 프랑스 남부 타른주 공동농업경영체 ‘가엑 라 리브 페이잔’. 조르디 파제스씨(34)가 온실 문을 열며 이렇게 말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랑마다 다른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노랗게 핀 주키니꽃 옆으로 당근잎이 올라왔고, 콜라비는 땅 위로 불룩 솟아 있었다. 진짜 주목할 변화는 작물이 아니었다. 30대 청년 셋이 57㏊ 규모의 공동농장에서 함께 농사짓게 됐다는 점이었다.
◆땅 없는 셋, 폐업 농장을 잇다=로랑 퀴빌리에씨(36)가 양 120마리를 키우는 축사는 나무 칸막이가 줄지어 선 깔끔한 공간이었다. 바닥에는 짚이 고르게 깔려 있었고, 한쪽에는 건초더미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양 떼는 모두 초지로 나가 풀을 뜯는 중이었다. 그는 “목수로 일하면서 언젠가는 농사를 짓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며 “양봉과 축산에 끌려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기욤 갈리베르씨(35)도 목수 출신으로 제빵사의 꿈을 품고 합류했다. 두 사람 모두 농사는 처음이었고 자본도 토지도 없었다.
반면 파제스씨는 이미 다른 지역에서 혼자 채소를 재배하던 농부였다. 하지만 홀로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세 청년을 한 땅으로 이끈 것은 은퇴농가가 내놓은 폐업 농장이었다. 전 주인은 이 농장이 이웃 대농에 흡수되거나 여러 필지로 쪼개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독립된 소농으로 이어지길 원했다.
그 바람을 현실로 만든 곳은 토지보호조합 ‘테르 드 리엥’이었다. 시민 후원금으로 농지를 사들여 소농에 안정적으로 장기 임대하는 조직이다. 세 사람은 이곳을 발판삼아 공동농업법인 ‘가엑(GAEC)’을 세웠다. 여러 농민이 토지와 노동, 수익을 함께 운영하는 프랑스식 공동경영 모델로 신규 청년농 4명 중 1명이 택하는 방식이다. 2023년 세 청년은 그렇게 정식 농부가 됐다.
◆맡은 일은 달라도 수입은 같다=철제 화덕이 놓인 작업실은 갈리베르씨의 공간이다. 밀밭 8㏊와 호밀밭 2㏊에서 직접 기른 유기농 밀·호밀로 일주일에 두번 밀빵·호밀빵·진저브레드를 굽는다. 벌통 200여개를 돌보는 퀴빌리에씨의 담당 구역에서는 한해 꿀 2t 안팎이 나온다. 산꽃꿀·밤꿀·크림꿀이 직판장 선반을 채운다. 파제스씨는 온실을 포함한 1.5∼2㏊에서 채소를 책임진다.
자기 영역의 결정권은 각자에게 있다. 다만 수확이 몰리거나 가공이 바빠지면 셋이 함께 움직인다. 고가 농기계도 공동으로 쓴다. 갈리베르씨는 “초기 투자금은 각자 달랐지만 따지지 않았다”며 “매달 받는 돈은 1500유로(약 260만원)로 모두 같다”고 했다.

◆분뇨는 퇴비로…짚은 양의 잠자리로=농장의 생산구조는 채소·곡물·축산·양봉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양떼는 초지와 농장에서 거둔 곡물로 먹이를 자급한다. 양들이 남긴 분뇨와 짚은 발효돼 채소밭과 밀밭의 퇴비가 된다. 밀과 호밀을 거두고 남은 짚은 다시 양의 잠자리가 된다. 다양한 작물을 번갈아 심어 지력을 유지하고 병해충도 줄인다. 퀴빌리에씨는 “양이 남긴 것은 밭으로 가고, 밭에서 나온 것은 다시 양에게 돌아온다”며 “외부에서 들여오는 자재를 최대한 줄이는 게 우리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생산한 농산물과 가공품은 모두 유기농이다. 판매는 대부분 직거래다. 직판장은 월요일과 금요일 오후 5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열고, 토요일 오전에는 마자메 야외시장에 나간다. 홈페이지 ‘부티크’에서 미리 주문하면 정해진 날 농장 직판장이나 시장에서 찾아갈 수 있다.
◆한사람이 쉬어도 농장은 돌아간다=세 사람은 매주 한차례 모여 일정을 조율한다. 파제스씨는 “내 채소밭은 내가 결정하지만 농장 전체 일은 셋이 함께 판단한다”고 강조했다. 여름에는 순번을 정해 번갈아 쉰다.
혼자 농사짓던 시절 파제스씨의 달력에는 빈칸이 없었다. 공동경영을 시작한 뒤에는 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나머지 두 사람이 농장을 맡는다. 땅도 자본도 부족한 청년들에게 공동경영은 농업으로 진입하는 단단한 통로가 됐다.
갈리베르씨는 “농기계와 노동을 나누니 비용은 줄고 휴가가 생겼다”며 “큰 자본 없이도 생산부터 판매까지 책임지는 당당한 농부로 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