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에 있다, 전국에 잇다] 노을 명소 사천 실안
사천만이 물드는 장관, 전국 9대 일몰의 성지
해가 뉘엿뉘엿 기울면, 사천 실안의 바다는 조용히 타오른다. 물 위로 길게 뻗은 죽방렴의 검은 뼈대가 황금빛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점점이 흩어진 섬들은 하나씩 붉은 숨을 들이켠다.

◇실안 낙조가 전국 9대 반열에 오른 까닭
실안 앞바다의 죽방렴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어업의 살아있는 유산이다. 부채꼴 모양으로 박힌 나무 말뚝과 촘촘한 대나무 발 사이로 물살을 타고 든 물고기가 상처 없이 갇히는 방식으로, 이렇게 건진 죽방렴 멸치는 살이 단단하고 감칠맛이 깊어 일반 멸치보다 훨씬 높은 값에 거래된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온 죽방렴이 노을 속에 검은 실루엣으로 솟아오르는 순간, 실안의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시간의 무게가 쌓인 역사의 무대로 바뀐다. 실안을 찾는 사진작가들이 한결같이 죽방렴 앞에서 셔터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그 안쪽으로 늑도와 초양도, 마도·저도·신도·두응도 등 작은 섬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한 폭의 수묵화를 완성한다. 노을이 깊어질수록 섬들의 윤곽은 더욱 선명해지고, 수면은 황금빛에서 주홍빛으로, 다시 자줏빛으로 천천히 옷을 갈아입는다.

'실안(實安)'이라는 지명에는 두 가지 어원이 전한다. 풍요로운 해산물 덕에 '편안한 삶을 누린다'는 뜻의 실안(實安)'이라는 공식 지명 외에 '실안(失眼)', 즉 '눈을 잃는다'는 이름도 함께 전해진다.
옛날 사천에는 승천하지 못한 두 마리의 용이 있었으니, 구룡산의 '구룡이'와 와룡산의 '와룡이'였다.
여의주를 얻는 것만이 승천의 방법임을 알고 수백 년을 헤맨 끝에, 두 용은 마침내 실안 바다에서 여의주를 발견하고 동시에 낚아챘다.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붉은 빛이 하늘과 바다를 순식간에 물들였고, 목격한 사람들이 '그 빛이 너무 밝아 순간 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해 이 바다를 '실안(失眼)'이라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노을전망교 위의 대형 조형물 '희망의 빛'은 바로 이 두 용의 승천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병풍처럼 서 있는 실안의 섬들도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다. '마도(馬島)'는 말을 닮은 섬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어잡이 그물에 갈(송진)을 먹이면서 어부들이 부르던 노동요 '마도갈방아소리'는 경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그 가락이 지금도 전해진다. 마도 앞바다는 전어의 고장으로도 유명해, 가을철 싱싱한 전어회는 이곳을 찾는 여행자라면 놓쳐서는 안 될 별미다.

◇걷고, 서고, 바라보다
발로 걸어야 비로소 실안이 열린다. 실안노을길은 사천 '이순신 바닷길'의 제4코스에 해당하는 해안 산책로로, 모충공원을 기점으로 노을빛 카페거리·실안마을·산분령마을·삼천포대교공원을 거쳐 대방진굴항과 늑도 유적지에 이르는 약 6~8㎞ 구간이다.
평탄한 해안도로와 섞여 있어 걷기에 무리가 없으며, 넉넉히 두 시간 반이면 완주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길의 이름에 걸맞게, 해 지기 한 시간 전에 걷기를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다. 노을이 익어가는 속도에 맞춰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하늘과 바다가 함께 붉게 물드는 순간을 길 위에서 고스란히 맞이하게 된다.
출발점인 모충공원은 사천해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공원이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한 달여 만에 이순신 장군은 이 사천만 일대에서 거북선을 처음으로 투입해 왜선을 격파했다.
사천만의 지형을 활용한 탁월한 전술과 거북선의 위력이 처음으로 역사에 새겨진 그 현장 위에 모충공원이 있다. 전투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도 이 바다의 노을을 바라봤을 것이다. 430여 년의 시간을 건너, 실안의 저녁 하늘은 그때와 다름없이 붉다.

배들이 그림처럼 떠 있는 항구 풍경을 배경 삼아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해가 기울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 자체로 실안 노을 여행의 한 장면이 된다. 서두를 이유가 없는 곳이다.
산분령 고갯길에 접어들면 창선·삼천포대교와 사천바다케이블카가 시야 가득 들어온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창선·삼천포대교는 사천 8경 중 또 하나로, 밤이면 화려한 조명이 점등돼 노을이 진 뒤에도 야경을 즐기기에 그만인 곳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역사 유산도 있다. '대방진굴항(大防津掘港)'은 고려시대부터 군함이 정박하던 인공 항구로, 울창한 숲에 가려 바깥에서는 그 존재를 알아채기 어렵다. 요새처럼 숨겨진 독특한 구조가 역사 애호가들의 발길을 끌어당기는 곳으로, 노을길 위에서 뜻밖에 만나는 조용한 보물이다.
실안노을길의 백미는 2021년 준공한 노을전망교다. 길이 324m의 보행교 위에 서면 사방이 바다와 하늘로 열리고, 수면 위로 뻗은 죽방렴의 구조가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바람을 맞으며 다리 한가운데 서는 순간, 실안의 노을은 풍경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된다.

노을전망교를 건넌 뒤에는 인근 장어구이 전문 식당에서 저녁을 마무리하는 것이 이 길을 걷는 여행자들의 단골 코스가 됐다. 봄철 갯벌에서 건져 올린 실안 개불도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진미다. 노을을 눈으로 담고, 장어와 개불로 배를 채우는 것. 이것이 실안식 하루의 마무리다.
인근의 사천바다케이블카는 실안 노을 여행을 입체적으로 완성해주는 선택지다. 초양도에서 각산까지 편도 약 2.4㎞를 운행하는 이 케이블카를 타면, 노을길 위에서 두 발로 경험한 풍경을 하늘 위에서 다시 한번 조망할 수 있다. 일몰 시각에 탑승하면 하늘과 바다가 동시에 붉게 물드는 장관을 360도로 감상하는 특별한 경험이 된다.
◇실안의 미래, 사천의 미래
실안은 이제 새로운 그릇을 빚어가는 중이다. 그동안 '전국 9대 일몰 명소'라는 공인된 타이틀과 빼어난 자연환경에 비해, 방문객이 머물 숙박 공간과 낮 시간을 채울 콘텐츠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천시는 일몰을 보고 떠나는 '반나절 관광지'에서 머물고 즐기는 '체류형 관광지'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민간 자본 유치를 통한 숙박 시설 확충을 추진 중이며, 관광 체질 개선을 목표로 한 인프라 정비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사무소가 최근 실안으로 이전하고, 국내 최초의 해양생태 체험교육센터 건립이 추진되는 것도 이 같은 흐름의 일환이다. 스킨스쿠버 교육 수영장, 해양 생물 관찰 프로그램, 수중 탐방로와 낙조 전망대 등이 들어서면 실안은 보고 떠나는 곳에서 머물며 배우는 곳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삼천포 실안에서 출발해 저도·마도·신도·늑도·초양도를 거쳐 삼천포대교공원으로 연결하는 '무지갯빛 탐방로' 조성도 추진 중이다. 지금껏 배로만 닿을 수 있었던 섬들을 걸어서 탐방하는 길이 열리면, 실안은 남해안 생태관광의 새로운 거점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풍경은 이미 완성돼 있다. 사천은 지금 그 풍경에 걸맞은 그릇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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