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이곳…1년 딱 1주일 열리는 '최고가 럭셔리의 문'

아르떼 2026. 5. 28.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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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스앤원더스 제네바 2026]
지난 4월 14일부터 20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서 열린
'워치스앤원더스 제네바 2026' 박람회

한국에서 럭셔리 시계 신제품을 먼저 보려면 길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브랜드 VIP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있거나, 백화점 담당자를 통해 프라이빗 쇼케이스 초대를 받거나, 매장 입고를 기다렸다가 줄을 서거나. 어느 쪽이든 브랜드가 정한 조건과 순서대로 시계를 만나게 된다.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이 구분되고, 그 구분은 대체로 돈을 기반으로 한 자격으로 정해진다.

그런데 1년에 단 한 번, 그런 조건이 잠시 뒤로 밀리는 시간이 있다. 누구나 국내 입고 전 신제품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그 시계를 만든 장인이 옆에서 설명까지 해준다. 제네바에서 열리는 워치스앤원더스(Watches and Wonders) 얘기다.

파리에 패션위크, 라스베가스에 CES가 있다면 제네바에는 워치스앤원더스가 있다. 시계 애호가들이 살면서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하는 전 세계 최대 규모의 시계 박람회. 1년에 한 번, 일주일 동안 주요 시계 제조사들이 모여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구현한다. 박람회장에 들어서면, 그리스·로마 신전이 연상되는 높은 기둥과 한자리에 모인 럭셔리 시계 브랜드의 파빌리온이 눈 앞에 펼쳐진다.

박람회장에서 도심까지, 워치메이킹을 둘러싼 생태계

워치스앤원더스 재단은 롤렉스와 리치몬트, 파텍 필립의 주도로 2022년 제네바에 설립된 비영리 재단으로, 이후 샤넬과 에르메스, LVMH 그룹까지 합류해 워치메이킹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목표로 한다. 이 행사는 신제품을 일렬로 늘어놓는 박람회라기보다, 각 브랜드가 구축한 세계관의 물리적 실체를 경험하는 공간에 가깝다.

올해 워치스앤원더스는 제네바에서 열리는 워치메이킹 행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회차였다. 65개 브랜드가 참가했고, 방문객은 약 6만 명에 이르렀다. 행사 초반 나흘은 업계 관계자와 리테일러, 프레스 전용으로 운영되고, 마지막 사흘은 입장권을 구매한 일반 관람객에게 개방됐다.

행사는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박람회장 안의 ‘인더살롱(In the Salon)’에서는 브랜드별 신제품 발표와 키노트, 컨퍼런스가 이어지고, 워치메이킹 시연과 가이드 투어, 어린이·가족 대상 체험 프로그램이 하루 종일 진행됐다.

제네바 도심에서는 ‘인더시티(In the City)’ 프로그램이 박람회장 입장권 없이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형태로 운영됐다. 시내 곳곳의 시계 매장과 광장에서 전시와 이벤트, 공연이 이어지고, 론강 위 퐁 드 라 마신(Pont de la machine) 건물에는 ‘워치메이킹 빌리지’가 마련돼 시계 제작 워크숍과 장인의 시연, 워치 분야 커리어를 소개하는 세션이 열렸다. 오데마 피게의 AP랩 역시 이곳에서 6월 28일까지 관람객을 맞는다.

워치스앤원더스는 이제 단순한 시계 산업 박람회를 넘어선다. 박람회장과 도심을 잇는 프로그램을 통해 워치메이킹 생태계를 아우르는 문화 플랫폼에 가까워지고 있다. 재단 의장 시릴 비네롱(Cyrille Vigneron)은 “이번 박람회는 시계 산업이 희소한 영역일 순 있어도, 소수만을 위한 폐쇄적인 세계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럭셔리의 무게중심이 ‘무엇을 소유하느냐’에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로 옮겨 가고 있으며, 다음 세대는 물건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신호를 분명하게 보낸다. 메종들이 그 신호를 모를 리 없다.

다음 세대의 고객 뿐 아니라, 메종의 기술을 이어갈 다음 세대 워치메이커를 어떻게 발굴하고 키울지도 함께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워치스앤원더스가 박람회장의 문을 일반 관람객에게까지 열고, 도심 곳곳에 무료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인더시티 프로그램을 펼친 데에는 이런 산업적 맥락이 깔려 있다.

오데마 피게의 복귀, 한 번의 몰입으로 마음을 빼앗는 법

올해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이름을 하나만 꼽으라면, 7년 만에 복귀한 오데마 피게를 빼놓기 어렵다. 박람회장에 문을 연 몰입형 전시 ‘하우스 오브 원더스(House of Wonders)’ 앞에는 일반 개방 일정 내내 긴 대기줄이 이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처음 마주친 것은 초록색 조명이었다. 오데마 피게의 메인 컬러를 공간 전체에 입혀, 들어서는 사람을 단번에 메종의 아우라 안으로 끌어들였다. 안내를 맡은 사람은 시계를 직접 만드는 워치메이커, 장인이 가이드 투어를 이끌었다.

스위스 워치메이킹의 가계도 안에서 오데마 피게가 어디에 자리하는지 짚어주고, 메종의 본거지인 르 브라쉬(Le Brassus)와 발레 드 주(Vallée de Joux)의 헤리티지를 자세히 풀어냈다. 공방에서 시간을 쌓아온 장인의 입으로 듣는 이야기여서인지 신뢰감과 전문성이 전혀 달랐다.

매뉴팩처를 구현한 공간에서는 스위스 공방 앞에서 주워 온 조약돌이 어떻게 무브먼트의 영감이 되었는지 설명이 이어졌다. 워치메이킹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동선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어느 순간 시간 감각이 사라졌다. 디즈니랜드에서 기차를 타고 어트랙션을 지나는 것처럼 순수한 몰입 상태에 가까웠다.

장인이 입고 있던 크림빛 셔츠가 유난히 눈길이 갔다. 워치메이커들의 작업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었고, ‘AP’ 자수의 마감과 소재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두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운영하는 팝업 하나에 도대체 얼마를 쓴 걸까, 그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나 이런 완성도로 세계관을 펼쳐내 찰나의 시간 안에 몰입하게 만들어야만 현대의 소비자가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을, 럭셔리 브랜드는 이미 알고 있다. 오데마 피게는 그렇게 방문객들의 마음을 홀렸다.

어떤 공간에서 마음을 빼앗기는 데 필요한 세 박자

이 감정을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루이 비통과 리치몬트에서 근무하면서, 럭셔리 브랜드가 공간 안에서 고객 경험을 어떻게 설계하는지 현장에서 지켜봐 온 터였다. 여러 메종의 고객 경험을 기획·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준이 생겼다. 사람이 한 공간에 들어와 마음을 빼앗기고, 그 기억을 오래 가져가게 만드는 데에는 언제나 공통된 세 가지 요소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먼저,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럭셔리는 결국 헤리티지를 파는 산업이고, 그 안에서 브랜드는 창립자의 앙트러프러너십(entrepreneurship), 즉 창업 DNA를 판다. 디올의 크리스찬 디올, 샤넬의 코코 샤넬, 오데마 피게의 가계도까지, 메종이 파는 것은 시계나 가방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한 사람의 서사이고, 그 서사를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떻게 이어 왔는가다.

그다음에는 와우 팩터(wow factor), 즉 들어서는 순간 ‘우와’ 하는 감탄을 끌어내는 한 방이 있어야 한다. 들어선 사람의 눈이 한 번에 메종의 세계로 끌려 들어가지 않으면, 뒤에 아무리 좋은 스토리가 깔려 있어도 그 사람의 마음은 이미 다른 데로 가버린다. 첫눈에 메종의 이미지가 뇌리에 박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완성도 높은 디테일이다. 셔츠 한 장의 마감, 자수 한 땀, 조명의 색온도, 안내자의 입에서 나오는 문장의 여운까지. 럭셔리의 고객 경험은 이런 감각적인 단서들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어내는 정서적인 반응이다. 정교하게 설계된 감각적 디테일은 단순히 예쁘다는 의미를 넘어 ‘이 브랜드만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감각을 뇌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기준으로 본 오데마 피게의 전시는 7년 만의 복귀라는 서사와 강렬한 공간 연출, 그리고 집요한 디테일이 맞물려 현장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세 가지 중 하나만 갖춘 팝업은 자주 본다. 둘을 갖춘 팝업도 가끔 본다. 그러나 셋이 동시에 맞아떨어지는 현장은 한 해에 한 번 만날까 말까다.

각 메종이 자기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

워치스앤원더스에 모인 다른 브랜드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추구하는 세계관을 구현했다. 헤리티지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브랜드 이미지를 시각화하거나, 워치메이킹 자체를 강조하는 메종까지. 각자 자신들의 핵심 자산, 즉 브랜드가 쌓아온 강점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파텍 필립과 롤렉스는 각각 노틸러스 50주년, 오이스터 출시 100주년을 통해 자사의 헤리티지를 기념했다. 파텍 필립은 올해 노틸러스 50주년을 맞아 파빌리온의 유리 벽면 전체를 과거 레퍼런스와 올해 한정 에디션 시계로 채운 전시로 둘러싼 뒤 내부 출입은 제한했다. 관람객은 벽을 따라 걸으며 제품을 볼 수 있지만, 투명한 유리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공간 안쪽 소파에는 아무나 앉을 수 없었다. 노출은 넓히되 선택적 접근성과 상징적 거리감만큼은 유지하려는 오늘날 럭셔리의 전략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롤렉스는 오이스터 케이스 탄생 100주년을 전면에 내세웠다. 평소 보기 어려운 뮤지엄 피스들과 함께 오이스터의 역사와 창립자인 한스 빌스도르프의 궤적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아카이브 전시를 마련했다. 오데마 피게와 더불어 가장 긴 대기줄이 이어져, 시계 브랜드로서 롤렉스가 차지하는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했다.

까르띠에는 ‘형태의 워치메이커(watchmaker of shapes)’라는 정체성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는 쪽을 택했다. 올해 컬렉션은 로드스터, 똑뛰, 베누아, 산토스 뒤몽 등 역사적인 케이스 형태들을 현대적으로 다시 풀어낸 모델이 중심을 이뤘다. 파빌리온 역시 직선과 곡선, 아치 구조를 반복해 사용해 어디에서 바라보든 까르띠에 특유의 실루엣이 먼저 떠오르도록 설계됐다. 과거 컬렉션에서 이어져 내려온 실루엣을 신제품과 공간 디자인에 동시에 반영해, 메종이 쌓아 온 ‘형태의 역사’를 시각적으로 한 번에 보여주는 식이다.

샤넬과 에르메스처럼 전통적인 시계 메종은 아니지만 시계 영역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브랜드들은 접근 방식이 조금 다르다. 패션 하우스로서 구축해 온 하우스 코드와 상징 자본을 시계에 옮겨 싣는 쪽을 택한다. 샤넬은 메티에다르 장인들이 완성한 체스 게임과 체스판을 무대로 삼아, 방돔 광장의 기둥이나 카멜리아 같은 상징을 체스말과 보드 위에 올린 워치 컬렉션을 선보였다.

에르메스 부스는 하나의 극장 무대처럼 느껴졌다. 프랑스 아티스트 장시몽 로슈의 목제 오토마톤 ‘Mysterious Mechanics’가 설치돼 밧줄과 도르래가 움직일 때마다 패널이 움직이며 시야가 바뀌며 말 모티프를 드러냈다. 구조물 가장자리에 마련된 작은 쇼윈도에는 올해 선보인 스켈레톤 워치들이 놓여, 내부 구조를 고스란히 드러낸 이 시계를 무대 장치 뒤편의 기계 장치에 비유하는 연출로 완성했다.

예거 르쿨트르는 ‘발명의 계곡’이라는 테마 아래, 6톤 얼음으로 만든 소나무 설치 작품으로 메종의 고향인 눈 덮인 발레 드 주의 겨울 풍경을 오마주했다. 이어 ‘워치메이커의 워치메이커’라 규정해 온 브랜드의 정체성을 장인들의 라이브 워치메이킹 시연과 미식 경험으로 구체화했다. 크로노미터와 멀티 액시스 투르비옹 등 브랜드의 고난도 워치메이킹 역량을 그대로 반영한 하이 컴플리케이션 워치가 공간 곳곳을 채웠다.

진열장 앞 감상에서 손끝의 체험으로

이곳에서 워치메이킹은 눈으로만 보는 대상이 아니었다. 인더살롱 안에서는 마스터 인그레이빙 장인이 이끄는 세션을 비롯해 누구나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개 워크숍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처음 박람회장을 찾은 20대 청년들이 진지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금속 표면에 선을 새겨 보고, 에나멜링 공정을 그대로 따라 해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연마를 거듭할수록 눈앞에서 광택이 달라지는 것을 직접 확인하면서, 평소 유리 진열장 너머로만 보던 시계에 대한 이해와 애착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이런 경험은 시계를 단지 소비의 대상이 아니라 시간과 손기술이 겹겹이 쌓인 관계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공정을 직접 따라 해 본 사람에게 시계는 더 이상 가격표와 스펙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잠시 거쳐 간 노동과 집중의 기억이 스민 사물이다. 워치메이킹을 직접 몸으로 겪어보는 일은 이 작은 물건을 둘러싼 세계와 이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소유에서 경험으로, 워치메이킹이 옮겨가는 무게중심

워치스앤원더스가 보여준 것은, 럭셔리가 더 이상 진열장 안의 물건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시계를 앞에 두고 장인이 공정을 설명하고 관람객이 직접 손끝으로 따라 해보는 장면은, 높은 가격표보다 먼저 이 산업이 어떻게 시간·기술·노동을 축적해 왔는지를 체감하게 한다.

다음 세대의 고객과 워치메이커를 동시에 설득해야 하는 지금, 메종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더 가까이 열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박람회장과 도심을 잇는 프로그램, 진열장 밖으로 나온 워크숍과 전시, 장인의 손동작은 모두 그 과제에 답하려는 다양한 시도다. 제네바에서 마주한 워치스앤원더스는, 소수에게만 열려 있던 워치메이킹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며 새로운 고객을 향해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준 현장이었다.

제네바=김인애 럭셔리&컬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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