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간첩 조작도 억울한데 '공소보류자'로 43년… 침묵하던 검찰, 마침내 구제 나서나
불법 연행돼 누명… 협박에 강제 근무까지
김병진씨 진술서 제출… "감내 어려운 모욕"
전례 없는 '공소보류 취소'… 첫 사례 주목

1980년대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의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피해자 김병진(71)씨가 제기한 '공소보류 처분 취소 진정' 사건을 둘러싸고 검찰 내 기류가 변하고 있다. 김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유죄를 전제로 받은 공소보류를 직권취소해 달라"고 호소해왔는데, 검찰이 장기간 법리 검토를 끝내고 마침내 응답할 채비에 나서면서다. 40여 년 만에 국가폭력 피해자의 '공소보류자' 굴레를 풀어주는 첫 결정이 내려질지 주목된다.
28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1부(부장 윤수정)는 19일 김씨 측으로부터 공소보류 처분 직권취소 요청 진정 관련 진술서를 제출받았다. 진술서 제출은 검찰 요청에 따라 이뤄졌는데, 지난해 8월 대검찰청에 진정서를 제출한 지 9개월 만이다. 검찰은 그간 김씨가 간첩 조작 사건 당시의 경험을 기반으로 저술한 책 '보안사'와 수사·재판 기록,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공소보류 관련 법제 등을 분석해왔다.
김씨는 진술서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은 지속적인 고문과 가족을 볼모로 한 협박으로 정신과 육체를 철저히 파괴했고, 이런 강압과 공포 속에 작성된 진술서는 의사와 무관하게 저를 북한 공작원에 포섭된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한 시나리오에 따라 꾸며진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으로 피신해서도 계속 감시와 협박을 받고 여권 발급도 금지됐는데, 이 모든 일의 법적 시작은 보안사 요구에 의해 검사가 내린 공소보류 처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짚었다.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 3세인 김씨는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3년 7월, 영장 없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연행돼 3개월간 불법 구금됐다. 수사관들은 이미 김씨가 재일대남공작지도원으로 지목된 서성수(75)씨에게 포섭된 간첩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쥐도 새도 모르게 한강 물에 흘려버린다"는 협박과 함께 구타·전기고문 등으로 자백을 강요했다. 김씨에겐 아내와 태어난 지 100일 남짓인 아들이 있었다.
김씨는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당시 서울지검에 송치됐고, 사건을 담당한 공안검사는 그를 공소보류 처분했다. 공소보류는 국가보안법상 검사가 양형조건을 참작해 공소제기를 보류하는 제도로, 기소유예와 같은 유죄 취지 처분이다. 보안사는 공소보류를 빌미 삼아 김씨를 '역용간첩'(이중간첩) 명목으로 수사과에서 2년간 강제 근무시키기도 했다. 1986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피신한 그는 1988년 책 '보안사'를 펴내 국가폭력 실태를 고발했다. 일본어판은 아사히신문사 논픽션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2009년, 2024년 두 차례 김씨 사건 관련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결정문엔 "검찰은 민간인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가 국가안전기획부 명의를 빌려 위법 수사한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공익의 대표자로서 수사기관에 대한 지휘·감독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결론과 더불어, 사과와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 권고가 담겼다. 심지어 김씨 '상부선(上部線)'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서씨가 2017년 재심 상고심에서 무죄 확정됐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검찰의 검토가 길어진 배경엔 공소보류 처분을 취소한 전례가 없다는 부담이 깔려 있다. 국가보안법은 공소보류 결정 후 2년이 경과하면 소추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어차피 기소가 불가능한 상황에 공소보류 처분 취소의 이익이 있는지 등도 검찰의 고심이 컸던 지점이다. 관련해 1969년 이래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법무부령 '공소보류자 관찰규칙'은 공소보류자 동태를 감시하도록 규정하면서도, 관찰 종료 시점은 명시되지 않아 인권침해 소지가 크단 지적을 받아왔다.

검찰의 기류 변화는 정부 기조와도 연관이 깊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재일동포 간담회에서 "위대한 민주화 여정 속에서 정말로 많은 재일동포들이 억울하게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로 고통을 겪었다"며 공식 사과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공소보류와 비슷한 기소유예를 두고 "불법구금, 고문을 당했음에도 사실상 유죄 인정 처분으로 범죄 기록을 안고 평생을 살아왔지만 구제되지 못한 분들"이라며 "부당한 처분을 바로잡아 '혐의없음' 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선례가 없는 사안인 만큼, 김씨 진정에 대한 결론은 향후 유사 사례 처분의 기준점이 될 전망이다. 김씨는 이날 본보에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공소보류자로 기록돼 있었다"며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모욕이자,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진 2차 가해"라고 밝혔다. 김씨를 대리해 온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피해자들이 부당한 유죄 취지의 공소보류 낙인을 평생 떠안고 살게 두는 것이 온당한지에 대한 국가의 책임 있는 답변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유지 기자 mainta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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