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 R&D 거점'으로…한국 시장 밀착하는 릴리
송도 입주 기업에 임상 데이터셋 및 AI 신약 플랫폼 '튠랩스' 전면 개방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을 향한 글로벌 빅파마들의 접근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국내 기업이 보유한 개별 신약 후보물질의 권리를 확보하는 기술수출 중심 거래가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바이오텍 자체를 인수하거나 연구개발 인프라를 직접 구축하는 방식으로 협력 구조가 진화하는 분위기다. 단순한 기술 확보를 넘어 성장 기반 자체를 함께 설계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 일라이 릴리(이하 릴리)의 한국 시장 행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비만·당뇨 치료제 시장 성장으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한 릴리는 인수합병(M&A)과 오픈이노베이션 투자 전략을 동시에 확대하며 한국 제약·바이오 산업과의 연결고리를 넓혀가고 있다.
파이프라인 확보 넘어 기업 자체에 투자…달라진 협력 방식
최근 릴리는 GC녹십자의 미국 관계사인 큐레보(Curevo)를 최대 15억달러(약 2조2000억원) 규모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거래를 통해 릴리는 큐레보가 개발 중인 차세대 대상포진 백신 후보물질 '아메조스바테인(CRV-101)'의 글로벌 권리를 확보하게 됐다.
업계가 주목하는 부분은 거래 구조다. 기존에는 특정 후보물질의 권리를 도입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면, 이번에는 한국 기업이 해외에서 성장시킨 바이오텍 자체를 글로벌 빅파마가 인수하는 형태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특히 상업화 이후 생산은 GC녹십자가 담당하는 구조를 유지하기로 하면서 의미를 더했다.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대규모 자금 확보는 물론 글로벌 공급망 안에서 핵심 생산 파트너 역할도 이어갈 수 있게 된 셈이다.
릴리의 국내 기업 협력 사례는 이전부터 이어져 왔다. 올릭스와는 MASH 및 비만 치료제 후보물질 관련 계약을 체결했고, 알지노믹스와는 RNA 편집 치료제 공동개발, 에이비엘바이오와는 혈뇌장벽(BBB) 이중항체 플랫폼 관련 대형 계약을 체결하며 협력 범위를 지속적으로 넓혀왔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도 2020년부터 위탁생산(CMO)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송도에 美 외 최대 거점 구축…AI와 임상 데이터도 개방
릴리의 한국 전략은 단순히 유망 기술을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최근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와 협력해 인천 송도에 글로벌 바이오텍 인큐베이터인 '릴리 게이트웨이랩스 코리아(Lilly Gateway Labs Korea)' 구축 계획도 발표했다.
중국에 이어 미국 외 지역에서는 두 번째이며, 규모로는 최대 수준이다. 오는 2027년 개소 예정인 이 시설에는 최대 30개 국내 바이오기업이 입주할 수 있다.
특히 입주 기업들은 단순히 연구 공간만 제공받는 것이 아니다. 릴리가 장기간 축적해온 임상 데이터 기반 AI 플랫폼 '튠랩스(Tune Labs)'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개발 중인 후보물질을 기존 임상 자산과 비교하거나 인체 내 작용 가능성을 예측하는 등 연구 초기 단계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업계에서는 송도 거점이 국내 스타트업의 연구 역량과 릴리의 신약개발 경험,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제조 경쟁력이 연결되는 협업 플랫폼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
150주년 미디어세션에서 확인된 '한국 투자 확대' 메시지
릴리의 이러한 행보가 일회성 투자가 아니라는 점은 최근 열린 한국릴리 창립 150주년 미디어 세션에서도 확인됐다. 한국릴리는 'Our Legacy is What We Do NEXT'를 핵심 메시지로 내세우며 향후 성장 전략과 연구개발 방향성을 공유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시장은 미래 전략의 중요한 축 가운데 하나로 여러 차례 언급됐다.
존 비클 한국릴리 대표는 "한국은 세계적 수준의 연구자와 병원 시스템, 임상시험 역량을 보유하고 있어 연구개발 투자에 적합한 환경"이라며 "초기 단계의 유망 스타트업이 풍부하다는 점 역시 중요한 투자 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릴리는 보건복지부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향후 5년간 5억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도 제시했다. 투자금 대부분은 국내 임상시험 유치와 연구개발 분야에 투입될 예정이다.
큐레보 인수와 송도 프로젝트를 따로 떼어 놓고 보면 개별 투자 사례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면 그림은 달라진다. 검증된 기술은 직접 확보하고, 유망 기업은 조기에 발굴해 성장 기반까지 함께 만드는 방식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한국 바이오산업을 바라보는 글로벌 제약사들의 시각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고 보고 있다. 더 이상 한국을 기술 이전 대상이나 생산 거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글로벌 신약 개발 과정 안에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협력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