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둔황으로 사라진 원고 / 김양희

나 그곳에 가면 스며들고 말 것 같아/ 경쾌한 눈빛으로 서늘한 몸짓으로/ 마음 살 실컷 앓아도 견고하던 뭍 여자// 둔황으로 사라진 까탈스러운 여인/ 초승달 호수가 삼키지 못해 뱉었는지/ 얼마 후 알리바이를 도서관이 주웠다
『오늘의 시조』(2026, 상반기호)
둔황은 사막과 오아시스가 공존하는 독특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동서양 문명이 교차하는 실크로드의 진주다. 아련한 동경을 가진 이들에게는 꿈의 도시인 셈이다.
아래 글은 특이한 제목인 「둔황으로 사라진 원고」의 시작 노트다.
여인은 둔황엘 다녀온다고 했다. 열흘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게 언젠데 돌아왔다는 소식이 없다. 그날 여인의 눈빛이 물속 모래처럼 선명했다. 둔황에 가면 그곳으로 스며들어 버릴 것처럼 조용했다.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건넸다. 평소 씩씩한 여인이었다. 사막에서 빈손으로도 살아남을 사람이었다. 고통이 오면 10%로 줄여 받아들였다. 삶에 달관한 면모를 보였다. 별 그렁그렁한 사막의 밤만 바라보고 있는가. 맨발이 호수로 걸어 들어갔나. 별별 걱정을 다 했다. 한참 후 지인을 통해 연락이 왔다. 둔황 다녀와서 눈코 뜰 새 없었노라고. 밀린 글 마무리하느라고 도서관에서 살았노라고. 다행이다. 초승달 호수가 삼킬 수 없었던 까닭인 마감 원고.
보다시피 시작 메모가 더욱 시스럽다. 시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둔황으로 사라진 원고」는 그 주관성이 유별하여 쉽게 해득이 안 되는 점이 있다. 현대시를 읽을 때 배경 지식과 같은 사항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모름지기 텍스트 자체로만 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고전시가는 그 작품이 탄생한 텍스트 상황까지 살펴야 곡해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일반론이 있다. 여기서는 시인의 시작 노트를 통해 상황을 살피는 일이 작품을 음미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 그곳에 가면 스며들고 말 것 같아, 라는 첫수 초장에서 함께 스미어드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한 여인이 곧 등장한다. 경쾌한 눈빛으로 서늘한 몸짓으로 마음 살 실컷 앓아도 견고하던 뭍 여자다. 그 여인을 두고 화자는 둔황으로 사라진 까탈스러운 여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둘째 수 중장과 종장 초승달 호수가 삼키지 못해 뱉었는지 얼마 후 알리바이를 도서관이 주웠다, 라는 대목에서 보듯 비약으로 감상의 길이 다소 막혔는데, 시작 노트를 통해 풀렸다.
이렇듯 「둔황으로 사라진 원고」는 이채로운 작품이다. 새로운 착상이 또 다른 개성적인 시를 빚게 만든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읽을수록 더욱 맛깔스럽다. 긴박한 스토리가 도발적이면서 유려하게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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