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이상룡 선생의 종손 “박찬대 외가는 우리와 친가족 이상의 관계”…“22촌인데 관계 부풀렸다” 일부 언론 보도 반박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인천시장 후보가 자신의 외가와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과의 관계를 부풀렸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임청각 쪽 인사가 “촌수로 설명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박 후보 외가와 임청각은 단순한 족보상 관계를 넘어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고난을 함께 겪은 “가족 같은 관계”였다는 취지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4대 종손인 이창수 씨는 26일 밤 뉴데일리 기사에 직접 댓글을 달아 해당 보도 내용을 반박했다. 댓글을 직접 단 게 맞냐는 주간경향의 질문에 이 씨는 “본인이 쓴 글이 맞다”고 답했다.
뉴데일리는 앞서 박 후보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외손’을 자처했지만 족보상으로는 직계가 아니라 22촌 안팎의 방계 혈족이라고 보도했다. 해당 보도는 박 후보가 유권자에게 직계 후손인 것처럼 오인하게 했을 수 있다는 취지의 문제 제기도 함께했다.
이 씨는 “그게 왜 논쟁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촌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찬대 외가는 지금도 우리 가족과 같은 관계”라며 “촌수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 씨에 따르면 박 후보 외가는 임청각 집안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가까이서 도운 집안이었다. 그는 “도와준 정도가 아니라 실제 옆집에 살았다”며 “우리가 제일 힘들 때, 우리 집이 만주로 가기 전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귀국했을 때도 도왔다”고 말했다.
이 씨는 석주 이상룡 선생의 아들인 동구 이준형 선생이 귀국한 뒤의 사정도 설명했다. 그는 “우리 가족이 귀국했을 때 왜놈들이 하도 괴롭혀서 임청각에서 30리 떨어진 도치리라는 마을로 갔다”며 “박찬대 외갓집은 도치리 마을에서 우리 옆집에 살았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 증조부인 동구 이준형 선생과 박찬대 외가 할배는 1875년생으로 동갑”이라며 “제일 힘들 때 제일 많이 도와줬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집안 사람들과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제일 의지가 되고 제일 많이 도와준 집안이 박찬대의 외가 쪽”이라고 했다.
이 씨는 특히 이준형 선생이 1942년 9월 2일 자결하던 날 박 후보 외가 인사가 현장에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고통에 방 안에서 몸부림칠 때 우리 할머니가 옆집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해 박찬대 외가 할배가 바로 뛰어와 범계정 문을 뜯고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어 “선혈이 낭자하고 방 안이 난리 난 상태에서 증조부를 일으켜 세웠고,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해서 유서를 쓰게 했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그 어려운 과정을 다 겪은 사람이 박찬대 외가 할배인 종자 호자라는 분”이라며 “피 묻은 유서도 다 수습했다”고 말했다. 그는 “촌수로 설명할 사이가 아니다. 그냥 친가족의 친가족 같은 사이”라고 했다.

이 씨는 임청각과 박 후보 외가의 관계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지금도 박찬대 외할아버지 사촌 되는 분이 서예가인데 우리 집 임청각 관련 모든 글씨를 지금 다 쓰고 있다”며 “지금까지도 찬대 외가와는 가족같이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뉴데일리 보도는 박 후보의 외조부가 석주 이상룡 선생의 직계가 아니며, 두 집안의 관계가 족보상 20촌 이상 떨어진다는 점을 근거로 ‘외손’ 표현의 적절성을 문제 삼았다. 또 박 후보 측이 “직계 외손이라고 표현한 적은 없다”며 “외가 문중의 종손 어른을 높여 부른 표현”이라고 반박했다고 전했다.
이 씨의 반박은 박 후보와 임청각의 관계를 단순한 법적 친족 범위나 족보상 촌수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독립운동가 집안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던 시기, 박 후보 외가가 생활공동체 안에서 임청각 집안을 실질적으로 도왔고, 그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다음은 주간경향과 석주 이상룡 선생의 종손 이창수씨가 5월 27일 낮, 전화로 나눈 일문일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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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뉴데일리 기사에 댓글은 직접 다신 건가
“그렇습니다.”
- 그러니까 실제로 박찬대 외가가 많이 도왔다는 말이죠.
“도와준 정도가 아니라 실제 옆집에 살았고요, 우리가 제일 힘들 때 우선 우리 집이 만주로 가기 전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귀국했을 때부터.”
- 이준형 선생이 귀국했을 때?
“예 우리 가족이 다 귀국했을 때 왜놈들이 하도 괴롭혀서 임청각에서 30리 떨어진 ‘돗질’이라는 마을로 갔어요. 박찬대 외갓집은 ‘돗질’이라는 마을에 우리 옆집에 살았고요, 그때도 우리 증조부인 동구 이준형 선생하고 박찬대 외가 할배와 동갑이에요. 1875년생에 동갑이니까 제일 힘들 때 제일 많이 도와줬죠. 그때도 사실은 시골에 있는데 안동말로 하면 ‘사흘또리’로 왜놈이 찾아와서 친일하라 하면서 누가 왔다 가는지 감시하니까 그 집 사람들,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때 제일 의지가 되고 제일 많이 도와줬지요. 그러고 나서 우리 증조부가 1942년 9월 2일 날 자결하실 때 그날이 생신날이었습니다. 그날 아침에 박찬대 외가 할배랑 같이 아침을 드셨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다가 자결을 하셨는데 이제 그 고통이라는 게 참, 심하잖아요. 그래서 그 고통에 방안에서 몸부림칠 때 우리 할머니가 옆집에 가서 찬대 외가 할배 있는데 우리 안동말로 ‘우리 아뱀이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뛰어오셔서 그 정자 이름이 범계정이라고 합니다. 범계정 문을 뜯고 들어가서 선혈이 낭자하고 방안이 난리 난 상태에서 우리 증조부를 돌아가시기 직전이었죠. 그때. 증조부를 일으켜 세우니까 지필묵을 가져오라 해서 지필묵을 가져와서 그때서야 증조부가 또 유서도 쓰고 그 자리에서 그 어려운 과정을 다 겪었지요. 그러니까 이제 그 사이라는 게 뭐 촌수로 설명할 그럴 사이가 아닙니다. 그냥 친가족의 친가족이죠. 그런 사이인데 지필묵을 가져와서 유서 쓰고 그 피 묻은 유서도 다 수습한 사람이 박찬대 외가 할배인 종자 호자라는 분이에요.”
- 그렇군요.
“이야기하면 길어지는데 박찬대 외할아버지의 조부 대거든요. 정확하게는. 외할아버지의 조부면 또 너무 멀어 보이잖아요. 그래서 그냥 외가 할배로 쓰시면 되겠고요. 박찬대 외가 직계 조상 이렇게 하면 되겠지만.”
- 알겠습니다. 22촌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그게 왜 논쟁거리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촌수가 중요한 것이 아닌 거든요. 우리가 종가에서 생각하는 건 찬대 외가는 지금도 우리 가족이거든요. 지금도 찬대 외할아버지 그 사촌 되는 분이 서예가인데 우리 집 임청각 관련 모든 글씨도 지금 다 쓰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그 찬대 외가랑은 가족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 촌수로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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