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문, 600년 겹쳐 쓴 시간이 쌓아올린 에너지 [더 라이프이스트-김성훈의 지속 가능한 공간]

2026. 5. 27.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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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서울 사대문 지도_김성훈 건축가 스케치

 역사와 장소가 만드는 도시의 힘

2026년 3월 어느 밤, 나는 TV 화면을 통해 광화문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탄소년단(BTS)이 컴백 공연 '아리랑'을 열었다. 왕복 10차선 세종대로가 공연장이 되었고 광화문 외벽이 스크린이 되었다. 넷플릭스가 190개국에 생중계하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도 공연보다 그 장소 자체에 시선이 머물렀다.

광화문. 저 문 너머에는 무엇이 쌓여 있는가.

건축가로서 나는 오래전부터 장소를 물리적 좌표로만 보지 않는다. 장소에는 시간이 응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의 무게가 장소의 힘을 만든다고 믿어왔다. 그날 밤 화면 속 광화문을 바라보며 오래 품어온 이 생각이 하나의 방정식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E = mc² 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빛의 속도의 제곱이다. 작은 질량 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잠들어 있으며, 조건이 갖춰질 때 비로소 방출된다. 장소의 질량(m)은 바로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길고 깊을수록, 방출되는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제목이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사대문의 방정식.
 

 시간과 역사성 — 장소의 힘은 어디서 오는가

왜 어떤 장소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어떤 장소는 그냥 지나치게 되는가. 왜 같은 크기의 광장이라도 누군가는 그 앞에 서서 숨을 고르고, 누군가는 그냥 통과하는가.

나는 그 답이 '시간의 층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장소는 그 위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기억한다. 사람들의 감정이 공간에 스며들고, 반복되는 역사가 겹쳐지면서 보이지 않는 밀도가 형성된다. 이것이 장소가 가진 질량(m)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설계된 새 공간도, 시간이 만든 이 밀도를 단번에 가질 수는 없다. 역사성은 돈으로도, 설계로도 살 수 없는 장소의 본질적 자산이다.

그날 밤 광화문이 그토록 압도적이었던 것은 BTS의 무대 규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 600년의 시간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이 설계한 도시 — 철학을 공간으로 번역하다

1394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질 때 정도전은 한양을 설계했다. 고려 왕조를 뒤로 하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만들겠다는 혁명적 기획이었다.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었다. 새 왕조의 이념을 공간으로 번역한 행위였다.

설계의 논리는 명쾌했다. 경복궁을 북악산 아래 정북(正北)에 두고 남쪽으로 광화문-종로-숭례문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심축을 설계했다. 사직단을 서쪽에, 종묘를 동쪽에 좌우 대칭으로 배치해 왕조의 권위를 공간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가장 탁월한 결정 — 4대문의 이름에 유교의 핵심 덕목을 새겨 넣었다.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에는 인(仁), 서쪽 돈의문(敦義門)에는 의(義), 남쪽 숭례문(崇禮門)에는 예(禮), 북쪽 숙정문(肅靖門)에는 지(智).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동서남북에 배치되었고, 도성 한복판 보신각의 신(信)까지 더해 오상(五常)이 완성되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철학 텍스트였다. 사람들은 어느 문을 통해 도성을 드나들든 덕목의 이름 아래 걸어 들어왔다. 이것이 사대문이 가진 질량(m)의 첫 번째 층위다.
 

 오스만과 정도전 — 재상이 도시를 바꿀 때

역사를 돌아보면 도시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왕이 아니라 재상이었다.

나폴레옹 3세 치하의 파리를 떠올려보자. 19세기 중반 조르주-외젠 오스만은 중세의 미로 같던 파리를 완전히 해체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파리를 설계했다. 방사형 대로, 균일한 파사드, 공원과 하수도 체계, 오스만은 왕의 권한을 빌려 도시를 이념으로 재조직했다. 그 도시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불린다.

정도전은 그보다 450년 앞서 똑같은 일을 했다. 왕이 아닌 재상이, 이념을 도시로 번역했다. 오스만이 근대성과 효율을 파리에 새겼다면 정도전은 인의예지를 한양에 새겼다. 방법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도시는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시민이 매일 걸어 다니며 내면화하는 가치 체계라는 것. 탁월한 도시는 늘 탁월한 철학에서 태어난다.
 

 팔림프세스트 — 지우지 않고 덧쓴 도시

건축에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는 개념이 있다. 중세 수도사들은 양피지가 귀했기에 기존의 글을 지우고 그 위에 새 글을 썼다. 그런데 지운다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전의 글자가 희미하게 배어 나왔다. 팔림프세스트란 바로 이처럼 과거의 흔적 위에 새로운 것이 겹쳐져 두 층위가 함께 공존하는 다층적 상태를 뜻한다.

서울의 사대문이야말로 살아있는 팔림프세스트다.

정도전이 인의예지를 새긴 그 땅 위에 일제가 도성을 훼손했다. 돈의문(서대문)은 1915년 전차 도로 확장을 명목으로 철거되어 4대문 중 유일하게 사라졌다. 그 공백은 지워진 글자처럼 지금도 도시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나머지 세 문은 살아남았다. 전쟁의 불길 속에서도, 근대화의 망치 아래서도.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층위들이 덧씌워졌다. 2002년 붉은 물결의 함성이 덧씌워졌다. 2016년과 2024년 촛불의 빛이 덧씌워졌다. 비폭력으로 두 번의 탄핵을 이끌어낸 시민의 힘이. 그리고 지난 3월 21일 밤, BTS의 아리랑이 또 하나의 층위로 새겨졌다.

사대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계속해서 새로운 글이 쓰인다. 이것이 사대문이 가진 질량의 정체다. 600년의 팔림프세스트. 지우지 않고 겹쳐 쓴 시간의 무게.
 

 우리에게는 아직 쓰지 않은 글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사대문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들이 일제강점기와 압축 근대화를 거치면서 역사의 층위를 잃었다. 오래된 골목이 지워지고, 도심의 맥락이 끊어지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던 공간들이 재개발의 이름 아래 사라졌다. 팔림프세스트의 언어로 말하자면, 새 글을 쓰기 위해 이전의 글을 너무 깊이 지워버린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가능성을 믿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완전히 지워진 글도 흔적은 남는다.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성곽의 단편, 골목의 결, 오래된 지명 하나하나가 모두 팔림프세스트의 단서다. 과거를 단순히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흔적 위에 현재를 겹쳐 쓰고 그 위에 미래를 이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 도시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단절되지 않고 공존하는 도시 공간 구조, 그것이 진정한 도시의 힘이자 지속가능한 장소의 조건이다.

서울이 사대문을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면 경주도, 전주도, 공주도, 이름 없는 지방 소도시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팔림프세스트를 완성해갈 수 있다. 질량이 클수록 방출되는 에너지도 크다. 우리가 지켜내고 겹쳐 쓴 시간이 많을수록 그 도시의 에너지는 더 강해진다.

 도시의 가장 근본적인 자산

나는 프랑스에서 오래 살며 유럽의 광장과 도시를 걸었다. 오래된 공간마다 역사가 있었고 그것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다르게 본다. 유럽의 역사적 공간이 과거를 보존한다면, 서울의 사대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가고 있다. 정도전이 이념으로 설계한 팔림프세스트 위에 오늘의 시민들이 삶으로 새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도시경쟁력을 논할 때 우리는 인프라, 산업, 인구를 본다. 그러나 '에너지 있는 장소'야말로 도시의 가장 근본적인 자산이다. 그 에너지는 탁월한 철학적 설계 위에, 수백 년의 시민이 반복해서 걸어들어오고, 울고, 웃고, 외치면서 비로소 완성된다.

사대문의 팔림프세스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쓰지 않은 글이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 E = mc² 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빛의 속도의 제곱이다. 사대문의 질량은 600년의 겹쳐 쓴 시간이다. 그리고 이 도시는, 아직 방출되지 않은 에너지로 가득하다.

<한경닷컴 The Lifeist> 김성훈 지음플러스 대표, 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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