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1번이 둘, 셋?”…지방선거 현수막 속 ‘가·나·다’ 정체는
한 정당 2~3명 출마 기호 구분
‘가번’이 가장 유리…경쟁 치열
거대 정당 ‘의석 나눠먹기’ 비판

본격적인 지방선거 시즌을 맞아 거리 곳곳에 후보 현수막과 벽보가 줄줄이 내걸렸다. 그런데 유심히 보다 보면 똑같이 '1번'인데도 누군가는 '1번-가', 또 다른 후보는 '1번-나' 혹은 '1번-다'라고 적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민들은 "왜 번호가 둘 이상이냐", "같은 당 후보끼리 왜 나뉘냐", "가번이 더 높은 사람이냐"는 궁금증을 갖는다. 선거를 여러 번 치른 유권자에게도 헷갈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 동네에서 여러 명 뽑는 '중선거구제'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총선은 대부분 한 지역에서 1명만 뽑는다. 그래서 기호도 단순하다. 1번, 2번, 3번 식이다. 하지만 지방선거, 특히 기초의원 선거는 다르다. 한 선거구에서 2~4명을 동시에 뽑는 경우가 많다. 이를 '중선거구제'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한 지역에서 구의원 3명을 선출한다고 가정해보면, A정당 후보 2명, B정당 후보 2명, 무소속 후보 1명 이렇게 여러 후보가 함께 출마할 수 있다.
정당 기호는 국회 의석수 순으로 정해진다. 예를 들어 1번은 원내 1당인 더불어민주당, 2번은 원내 2당인 국민의힘, 이후 번호는 정당·무소속 순이다. 문제는 같은 정당에서 기초의원 후보가 둘 이상 나오면 둘 다 '1번' 혹은 '2번'이 된다는 점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붙이는 표시가 바로 '가·나·다'다. 즉 1번-가, 1번-나는 서로 다른 정당이 아니라 같은 정당 소속 후보들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1번 팀의 첫 번째 후보', '1번 팀의 두 번째 후보'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공천보다 '가번' 받는 게 더 중요
정치권에서는 오래전부터 "가 번이 유리하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같은 당 후보끼리 경쟁할 경우 유권자들이 상대적으로 앞 번호를 더 쉽게 기억하거나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방선거 현장에서는 "같은 당이면 가번이 더 낫다", "공천보다 가번 받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이 흔하다.
물론 모든 지역에서 절대적으로 통하는 공식은 아니다. 후보 개인 경쟁력이나 지역 기반, 조직력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하지만 특정 정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에서는 '가번 프리미엄'이 실제 존재한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 인식이다. 그래서 공천 과정에서도 단순히 "공천을 받느냐"를 넘어 "몇 번을 받느냐"를 두고 경쟁이 벌어진다.
현역이나 인지도 높은 후보에 '가번'
정당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은 현역 의원, 조직력이 강한 후보, 인지도 높은 후보 등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후보에게 '가번'을 주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정치 신인이나 청년·여성 후보는 상대적으로 '나번'이나 '다번'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고령층 비율이 높은 지역이나 정당 지지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는 "같은 당이면 가번이 더 유리하다"는 말이 나온다. 이 때문에 공천 과정에서 '가번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지방 정치권에서는 "공천이 끝난 순간 사실상 승부가 정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선거 현장에서는 같은 당 후보끼리도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명함에는 같은 정당 로고가 찍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서로 경쟁 관계이기 때문이다.
광주의 한 기초의원 출마자는 "정치 신인이라 '다번'을 받았다"며 "거리를 다녀보면 후보 이름보다 기호를 먼저 기억하는 유권자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기호를 얼마나 각인시키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현수막도 숫자를 크게 넣고 유세 때도 기호를 반복해서 강조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거대 정당의 의석 나눠먹기 비판
중선거구제의 원래 취지는 다양성 확대다. 한 지역에서 여러 명을 뽑으면 △다양한 정치세력 진입이 가능하고 △특정 정당 독식을 줄이며 △여성·청년 후보 당선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거대 정당이 복수 공천을 통해 의석을 나눠 가져가는 구조가 반복된다는 비판도 나온다. 특히 특정 정당 강세 지역에서는 '어차피 1번이 당선된다', '같은 당끼리 순번 경쟁만 치열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중선거구제 취지와 달리 '번호 정치'가 강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원래 중선거구제는 다양한 인물과 정치세력이 경쟁하라는 취지였지만 현실에서는 같은 당 후보끼리 경쟁을 벌이는 구조가 됐다"며 "지방선거가 후보의 정책과 역량보다 '몇 번이냐'에 좌우되는 현실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