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키워내는 일, 육아와 같아”···도전하는 이들과 공명하는 벤처캐피탈의 세계[여자, 언니, 선배들]

소녀는 언니를 보고 자랍니다. 여기 선배가 된 언니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이정표이자 버팀목이 되는 [여자, 언니, 선배들]의 일·커리어 이야기를 플랫이 전달합니다.
첫 도전 업체가 성공하고 상장을 준비하는 걸 보면서 보람이 크고 ‘아, 잘했다’ 싶더라고요. 힘든 상황을 하루하루 견디게 해주는 건 잘 되는 업체가 주는 꿈과 희망입니다.
벤처기업은 규모가 작고 미래도 불분명하다. 벤처기업을 키우는 일은 숨은 진주 찾기 내지는 유망주 떡잎 발굴하기에 비유할 만하다. 진주는 끝내 빛나지 않을 수도 있고, 떡잎이 시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유니콘 기업’의 꿈을 안고 창업에 나선다. 창업자들은 보통 자금 조달에서 난관에 부딪히곤 하는데, 여기서 성장 잠재력이 높은 업체를 발굴해 투자하는 투자자가 바로 벤처캐피탈리스트(VC)다. 물론 자선 사업은 아니다. 이들은 투자한 업체의 가치가 높아지면 수익을 회수(exit)한다. 투자한 기업과 벤처캐피탈리스트는 성공과 리스크를 공유하는 운명공동체가 된다.
유니온투자파트너스 박주연 수석심사역(45)이 처음부터 이런 ‘모험자본(스타트업 및 벤처기업에 공급되는 자금)’의 배에 탔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이학박사 학위를 가진 연구원 출신이다. 질병관리청(당시 질병관리본부), 과학기술일자리진흥원 등을 거쳤다. 그러다 2019년 5월 벤처캐피탈 분야로 진출해 바이오·헬스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투자심사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향신문 여성 서사 아카이브 플랫은 지난 14일 박주연 수석을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나 벤처투자의 세계를 소개받았다. 박주연 수석은 심사역의 역할이 ‘바쁘고 스트레스 받는’ 일임을 숨기지 않았다. 소위 투자가 ‘망한’ 경우와 인간에게 실망하면서 겪는 정신적 어려움도 털어놨다. 그렇지만 그는 ‘아픈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업체에 투자했던 일, 마치 육아를 하듯 키워낸 곳이 잘된 경험을 들려줬다. 도전하는 이의 열정과 공명한다는 자부심과 애착이 그의 말에 묻어났다.
뛰어들다: 안정에서 모험으로

- 벤처캐피탈 업계로 진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원래는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박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질병관리청에 들어가 연구를 하면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연구는 한 가지를 깊게 파고드는 것이어서 그런지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연구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탐색하다 과학기술사업화진흥원에 들어갔어요. 과학기술의 사업화를 도와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기관인데요. (사업의) 앞단이 아닌 중간 정도의 업무여서 재밌게 일했습니다. 다만 공공기관은 아무래도 사기업에 비해 업무 범위가 한정되잖아요. 벤처캐피탈 쪽을 보니 발전가능성과 다양함이 있는 것 같아 벤처캐피탈협회의 교육을 받고 이직했습니다. 돌아보면 바쁘게 사는 걸 지향하는 성향이었던 것 같아요.”
- 벤처캐피탈 업계에는 어떤 배경을 가진 이들이 많나요?
“바이오·헬스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등 전문 기술 검토를 요하는 산업군에 투자하는 심사역은 석·박사 학위를 가진 분이 많고요. 그렇지 않은 산업군에는 전문적 학위가 없더라도 산업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분들이 투자를 진행합니다. 섹터를 보면 소부장보다는 바이오·헬스 쪽에 여성 심사역이 좀더 많긴 합니다. 업계엔 스타트업을 직접 경험해 본 심사역도 계십니다.”
- 이전에 다른 일을 했던 경험이 도움이 되기도 했나요?
“바이오·헬스 쪽은 회사를 창업하면서 기술이 갑자기 생기는 경우는 별로 없고 학교나 공공기관에서 했던 기술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예전에 일하면서 기술이 사업화되려면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 특허는 어떻게 구성되는지,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지 등을 충분히 봤기 때문에 투자 업체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원활했던 측면이 있습니다. 결국 ‘기술의 사업화’라는 큰 카테고리 내에 있는 것이니까요.”
- 경제·산업의 구조 속에서 벤처캐피탈은 어떤 역할을 맡나요?
“대기업은 자본시장에서 원활하게 자금조달이 가능하지만 중소·벤처기업은 은행 대출도 용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기술을 가졌다면 개발 필요성은 충분히 존재합니다. 정부는 그런 기업을 육성하려고 모태펀드(펀드에 투자하는 펀드)를 출자하기도 하고, 저희는 그걸 받아서 민간 자금과 매칭해 운용하면서 업체가 성장하도록 투자합니다. 대기업과 협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거나 다른 업체와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연결을 해준다거나 하지요. 예를 들어 저희 회사는 전체 투자 금액의 절반 정도가 콘텐츠 산업에 가 있습니다. 콘텐츠는 중소기업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올라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대기업이 하지 못하는 영역을 시도하는 기업에 투자해 K-콘텐츠 활성화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발견하다: 벤처투자의 세계

- 투자할 만한 업체는 어떻게 찾아내나요?
“매일 아침 출근길에 기사를 보면서 ‘괜찮아질 것 같다’ 싶은 섹터가 있으면 관련된 회사를 검색합니다. 콜드 메일·콜드 콜(친분이 없는 상대에게 처음 하는 연락)을 하기도 하고, 주주명부를 구해 기존 주주들에게 연락해 연결을 부탁하기도 하지요. ‘관심이 있는데 나와 만나주겠느냐’고 요청하는 겁니다. 좋은 회사는 투자자가 먼저 가서 투자 의향을 밝히는 것이 대부분이거든요. 벤처캐피탈은 (연락을) 주저하지 않고 해야 합니다.”
- 한 해 투자가 몇 건 정도 이뤄지나요?
“지난해 6개 정도 기업에 투자했는데, 절반은 기존 업체에 대한 후속 투자 지원이었고 나머지는 새 업체 발굴이었습니다. 저희도 모험자본을 운용하는 기관이지만 코로나19 이후엔 자본을 안정적으로 투입하려는 니즈가 많아졌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성숙된 단계의 업체에 일부 자금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는 건 초기 단계 업체이기 때문에 그쪽에도 골고루 집행했습니다. 사후 관리하는 업체는 20여곳이고요.”
- 무척 역동적이고 바쁜 직업일 것이란 인상이 있습니다. 바쁜 시즌은 언제인가요?
“3월이 제일 바쁜 시즌입니다. 주주총회를 보통 3월에 하기 때문에 그때 사후 관리하는 업체들의 주총 안건을 확인해야 합니다. 펀드 보고회도 3월에 있어서, 회사 현안과 지난해 현황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해요. 또 펀딩 시즌도 바쁜 편입니다. 후속 투자를 하거나 다른 투자자를 소개하려면 검토 보고서를 써야 하거든요. 평소엔 오전 중 메일과 뉴스, 펀드 출자 기관의 요청 사항을 확인하고, 오후엔 미팅이나 사후 관리 업무를 해결하고, 저녁엔 동종 업계 혹은 사업하는 분들과 네트워킹을 합니다. 심사역의 일로서 업체 발굴-검토-계약-사후 관리가 하루 동안 루틴하게 돌아갑니다.”
- 바이오·헬스 투자는 어떤 리스크를 특히 중요하게 보나요?
“보통은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은데 자금이 필요한 분들이 저희를 찾아오시는데요. 이 데이터가 진짜로 좋은 데이터인지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 데이터가 예측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나라 바이오 기업은 대부분 기술 이전을 하겠다는 걸 비즈니스 모델로 갖고 있는데, 이 기술이 글로벌 제약사나 대기업에서 사갈 만큼 트렌드에 부합한 기술인지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는 항암제나 치매 치료제에 기술 이전 수요가 많거든요. ‘이 기술이 트렌드에 부합하기 때문에 사갈 수도 있겠다’는 예측이 가능한 기업에 자금이 많이 몰리고 상장도 원활합니다. 결국 시장에서 ‘누가 이걸 사갈 것인가’가 가장 리스크이지요.”
- 요즘 업계 분위기는 어떤 편인가요?
“코로나19 이후 밸류에이션이 많이 눌려 있었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상장시장이 좋아졌잖아요. 투자 회수는 결국 상장시장에서 이뤄지게 돼있기 때문에 비상장 업체에 투자하는 저희 입장에서는 회수가 원활히 이뤄지리란 기대감은 일단 있습니다. 그럼에도 테크 기반 업체가 기술특례상장(성장 잠재력이 큰 기업을 위해 상장 문턱을 낮춰 주는 제도)을 주로 시도하는 상황에서 생각만큼 많이 상장이 이뤄지진 않고 있습니다. 회수를 한다면 큰 이익이겠지만 회수하기에는 난이도가 높아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상장 난이도가 올라가면서 상장 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자금이 (예전보다) 훨씬 몰립니다. 아무래도 초기 기업이 투자를 받기에는 녹록지 않은 상황이죠. 전반적으로 업계 분위기는 증시나 정부 자금의 성격 등에 영향을 받습니다.”
마주치다: 키워낸다, 아이처럼

- 심사역에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한 건 어떤 산업이나 기술이 좀더 성장가능성이 있을지 판단하는 역량입니다. 산업에 대해 지속적으로 호기심을 가지고 공부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 지켜야 할 직업 윤리는 무엇인가요?
“기본적으로는 펀드 운용 인력의 윤리와 관련된 것인데요. 펀드를 운용하고 자금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대상) 업체에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고 받아서도 안 됩니다. 투자자는 투자 업체 이사회에 들어가더라도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투자한 업체에 나의 이해관계에 관한 어떠한 것도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업체가 가진 정보를 외부에 노출하지 않아야 합니다. 경쟁 업체에 그 정보가 들어가면 치명적이기 때문이지요. 상식 선에서 이상하다 싶으면 하지 말아야 해요.”
- 기업을 찾아 키워내는 일이 일종의 육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육아 맞습니다. 지금 기업평가 중인 업체는 제가 2019년 업계에 와서 처음 투자한 업체거든요. 그 업체가 조금씩 성장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최근에 기술이전도 했거든요. 첫 도전 업체가 성공하고 상장을 준비하는 걸 보면서 보람이 크고 ‘아, 잘했다’ 싶더라고요. (지켜보니) 대표는 외로운 자리입니다. 대표님들은 힘들어도 말할 곳이 많지 않거든요. 힘드실 때 가끔 연락와서 하소연하는 걸 다 들어드리는 편입니다.”

- 일하면서 힘든 순간은 언제인가요?
“거의 대부분이 힘들죠. 애가 말 안 듣는 것과 마찬가지로 업체에서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거든요. 투자를 10개 했다고 가정하면 잘되는 건 절반 이하고, 나머지는 보통이거나 힘들어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힘들어진 업체의 하소연과 고충을 나눠줘야 해서 항상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출자자들에게 ‘잘 안 됐다’고 보고하는 과정도 힘들고요. 사실 제일 힘든 건 투자 전후로 업체의 태도가 달라지는 경우인데요. 다른 심사역들을 보면 업체 대표가 투자 전에 했던 말이 거짓말이었거나 투자금을 빼돌린 것이 사후에 확인된 사례도 있습니다. 벤처 투자는 대표와 업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인간적 배신감과 실망감이 들 때 제일 힘들죠.”
- 돈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멘탈 관리가 무척 중요한 직업이예요. 그런 일이 너무 많고, 또 투자한 회사 대표와 인간적인 관계가 구축돼 있기 때문에 망하면 나도 같이 마음 아프고 슬프거든요. 심사역들은 스스로 회복하는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아이에게 ‘엄마 이런 일 있었어’라고 이야기하면서 ‘괜찮다, 괜찮다’하는 편입니다.”
- 반대로 기쁜 순간은 언제인가요?
“사람에게서 오죠. 그 힘든 상황을 하루하루 견디게 해주는 건 잘 되는 업체가 주는 꿈과 희망입니다. 회사가 잘되고, 만날 때마다 좋은 소식을 주실 때 기쁩니다.”
꿈꾸다: 진실되고 열정적인 VC

- 롤모델이 된 선배가 있나요?
“없습니다. 이 분야는 약간 각자도생이고 ‘내가 제일 잘났어’ 하는 분야라서요. 굳이 한 명을 딱 찍어서 롤모델이라 할 수 있는 건 없고, 열정을 가지고 빠르게 적응하면서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해나가는 분들은 다 멋있더라고요. 인공지능(AI) 툴을 활용해 스마트하게 일하는 후배들도 많더라고요.”
- 나는 어떠한 선배, 어떠한 투자자로 남고 싶나요?
“투자를 하다 보면 결국 주위에 남는 건 사람밖에 없거든요. ‘저 사람은 항상 진실됐고 열정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평가받으면 좋겠습니다. 이 분야는 일을 오랫동안 같이 하면서 금전적·업무적인 부분에서 이해관계가 무척 맞물리게 돼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 사람이랑 같이 일했을 때 괜찮았다, 같이 일하고 싶다’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좋은 업체를 열심히 발굴해서 아이가 ‘우리 엄마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습니다.”
- 어떤 사람들에게 벤처캐피탈리스트를 추천하나요?
“여러 분야 중에서도 특정 분야를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싶다는 확신이 있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우선 산업에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재무나 다른 부분은 일하면서 배워나가도 늦지 않아요. ‘창업자의 꿈을 지원하겠다’는 두루뭉술한 생각보다는 어떤 분야에 왜 투자하고 싶은지 자신의 생각이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여성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힘들고 고되고 바쁜 직업이기 때문에 망설여진다면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이 있다면 (협회의) 교육 과정을 통해서 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일반 기업과 달리 벤처캐피탈에서는 지원자의 의지와 노력을 바탕으로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 채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노크를 해볼 수 있는 대범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만큼 본인의 적극성이 중요합니다.”
▼ 김서영 기자 westzero@khan.kr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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