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집주인 사기 입증하라니…" 전세사기 피해 탈락 95% 울린 '4호 요건'이 뭐길래

나민서 2026. 5. 27.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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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장모(36)씨는 지난해 3월 말 전세로 살았던 서울 양평동 오피스텔에서 이사한 뒤 1년 넘게 보금자리를 잃고 지인 집을 떠돌고 있다. 집주인에게서 보증금 2억1,000만 원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는데도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은 탓이다.

김정원 한뜻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전세사기특별법은 원래 민사 영역인데 범죄로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피해자를 먼저 도와주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며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된다고 해서 곧바로 임대인이 형사 사기범이 되는 것은 아닌 만큼, 피해 보장 및 긴급 지원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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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지원위원회, 피해 여부 심사
부결 95%가 '기망 입증' 문턱에 좌절
대출·주거 위기 떠안은 피해자들 발생
제도 남용 막으려다 구제 늦어질 우려
22일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빌라 밀집 지역 모습. 뉴스1

직장인 장모(36)씨는 지난해 3월 말 전세로 살았던 서울 양평동 오피스텔에서 이사한 뒤 1년 넘게 보금자리를 잃고 지인 집을 떠돌고 있다. 집주인에게서 보증금 2억1,000만 원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했는데도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은 탓이다.

장씨는 원래 그해 3월 31일 이사하기로 했지만, 집주인은 "새 임차인 보증금을 받아도 돈이 모자란다"며 날짜를 4월 2일로 미뤄달라 했다. 하지만 약속한 날에도 돈은 들어오지 않았고 보증금 반환 날짜는 4일, 8일로 계속 미뤄졌다. 결국 장씨는 4월 9일까지 새집에 치러야 할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새집 전세 계약이 깨졌다. 계약금 1,100만 원도 날렸다.

장씨는 피해 회복을 위해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했다. ①민사소송을 통해 집주인이 장씨에게 보증금과 손해배상금 등 2억2,100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을 받아냈고 ②이를 토대로 강제경매도 신청했다. ③그래도 보증금을 주지 않는 집주인을 사기 혐의로 고소해 경찰 수사도 시작됐다.

하지만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는 장씨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임대인의 보증금 미반환 의도, 이른바 '4호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장씨는 26일 한국일보에 "임차인이 집주인의 사기를 입증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성토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인정 '산 넘어 산'

전세사기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피해를 막기 위한 각종 법과 제도가 마련됐지만, 여전히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는 길은 '산 넘어 산'이다. 2023년 전세사기특별법 시행 이후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가 피해자 여부를 심의하는데, 네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1호는 전입신고와 확정일자 등 대항력 확보, 2호는 임대차 보증금 5억 원 이하, 3호는 경매·공매나 집행권원 확보 등으로 2명 이상 임차인에게 피해가 발생했거나 예상되는 경우, 4호는 임대인의 보증금 미반환 의도다.

피해자로 인정되면 공공임대주택 등 긴급 주거 지원, 저금리 전세자금 대출, 경매 시 우선매수권 부여 등 실질적 구제 조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피해자들이 마지막 4호에서 가로막힌다. 임대인이 보증금을 떼 먹을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임차인이 밝혀내는 게 애초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픽=강준구 기자

한국일보가 국토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는 올해 1~4월 총 6,030건을 심의해 2,594건을 가결하고 2,150건을 피해자 요건 미충족으로 부결했다. 이 중 4호 요건 미충족이 포함된 사례가 무려 2,051건이었다.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한 이들 95.4%가 '임대인의 보증금 미반환 의도 입증' 요건에 걸린 것이다.

4호 요건은 보증금 미반환 외에도 수사 개시, 기망 행위, 반환 능력 없는 임대 행위, 다수 주택 취득·임대 정황 등을 종합해 의도성을 따진다. 임차인들은 법원 판결과 경매·체납 자료까지 동원하지만 정부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해 탈락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본보가 만난 또 다른 피해자 김태진(38)씨는 보증금 약 1억6,500만 원을 돌려받지 못해 경매를 신청하고 임대인의 3억 원대 체납 자료까지 냈지만 1차 피해자 신청과 이의신청 모두 4호 미충족으로 불인정됐다. 김모(33)씨도 보증금 반환 소송, 은행 가압류, 강제경매를 진행하고 임대인이 무자본 오피스텔 3채를 매입해 최소 3명 피해가 발생한 정황까지 확인했지만 4호 미충족 결정을 받았다. 김씨는 "개인이 계약 당시 집주인의 재정 상태나 사기 고의성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제도 남용 막으려다 피해자 구제도 막혀

국토부는 4호 미충족이 늘어난 이유로 "전세사기와 일반 보증금 미반환을 구분하지 않고 신청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점을 들었다. 국토부 관계자는 "보증금 미반환이 발생하면 일단 신청하고 보는 경우가 상당수 있어 4호 미충족 부결이 높아지는 구조"라고 말했다. 자금 사정 악화, 투자 실패, 집값 하락, 임대차 분쟁 등으로 인한 미반환까지 모두 전세사기로 보기는 어렵다는 취지다.

그러나 제도 남용을 막으려다 긴급한 금융·주거 지원이 필요한 피해자들까지 제도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차인 커뮤니티에선 "검찰에 송치되는 수준이 아니면 피해자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불만이 들끓고 있다. 김정원 한뜻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전세사기특별법은 원래 민사 영역인데 범죄로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피해자를 먼저 도와주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며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된다고 해서 곧바로 임대인이 형사 사기범이 되는 것은 아닌 만큼, 피해 보장 및 긴급 지원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나민서 기자 iam@hankookilbo.com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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