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위에 내린 햇살…이혁과 이효, 닮지 않아 더 빛난 형제 듀오 [고승희의 리와인드]
지난해 쇼팽 콩쿠르 이후 첫 리사이틀
오는 28일엔 KBS교향악단과 협연
![지난해 제 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세미 파이널에 나란히 진출하며 클래식 음악계에서 주목받은 ‘피아니스트 형제 이혁 이효 듀오 리사이틀 [WCN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26/ned/20260526213320862tokk.jpg)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을 앙코르곡으로 연주할 때였다. 무대 위엔 두 대의 피아노가 있었지만, 마지막 곡에서 형제는 하나의 피아노에 나란히 앉았다. 형제의 어깨와 몸이, 고개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잘 맞는 소울 메이트처럼, 음악은 둘을 만나 하나가 됐다. 형제는 종종 서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빛만으로 서로의 호흡을 읽어내는 완벽한 일체감이었다. 그 미소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연대의 신호가 담겼다. 한 대의 피아노에서 네 개의 손으로 음악을 만들어온 긴 시간이 이날의 장면 뒤에 숨어있었다. 아지랑이처럼 형제의 어린 날들이 피어 올랐다.
같은 악기로, 같은 언어로 서로의 다른 음악 세계를 증명했다. 피아니스트 이혁 이효 형제의 듀오 리사이틀(5월 24일, 예술의전당)은 바르샤바에서의 영광을 다시금 꺼내보는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지난해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세미파이널에 나란히 진출하며 클래식 음악계에서 주목받았다. 유창한 폴란드어로 인터뷰하며 현지 매체의 집중 조명을 받는 장면이 연출된 것도 특이점이었다. 한국인 형제가 쇼팽 콩쿠르에서 나란히 활약한 것은 2005년 임동민, 임동혁 형제 이후 20년 만의 쾌거였던 만큼 쇼팽 콩쿠르를 향한 한국에서의 관심도 높았다.
이번 리사이틀은 두 형제가 솔로와 듀오 무대를 병행 배치, 각자의 독자적 음악적 색채를 선명히 보여주면서도 앙상블의 ‘극적 밀도’를 보여주는 자리였다. 특히 오는 28일 요엘 레비가 이끄는 KBS교향악단에서 연주할 프랑시스 풀랑크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D단조’ 협연을 앞두고 형제의 ‘음악적 동기화’ 상태를 점검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리사이틀의 프로그램 구성이 영리했다. 전반부에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쇼팽의 대작을 단독 연주하며 자신들의 학구적 뿌리와 피아니즘의 본질을 각인했고, 후반부에선 본격적으로 ‘듀오의 매력’을 살렸다. ‘따로 또 같이’ 선보이는 무대의 묘미를 극대화했다.
![이혁(오른쪽), 이효 형제 [쇼팽콩쿠르 홈페이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26/ned/20260526213321088vgwa.jpg)
공연의 포문을 연 건 형 이혁이었다. 그는 쇼팽의 ‘환상곡 바단조(Fantaisie in F minor, Op. 49)’를 선택했다. 엄숙한 장송 행진곡 풍의 서주로 시작하는 이 곡은 환상곡이 가지는 복잡한 화성의 흐름과 고도의 테크닉에 이어 웅장한 코다로 마무리된다.
이혁은 침착했다. 건반 위로 내려앉는 음표들이 명료하고 단정했다. 무게감 있으면서도 견고한 건축학적 타건이 이혁이 손가락마다 실체를 드러냈다.
그는 음 하나하나를 강조하며 감정에 치우치기보다, 악곡의 뼈대를 명료하게 세우는 구조주의적 접근법으로 자기만의 환상곡을 그려갔다. 극적인 순간도 서두르지 않았다. 프레이징의 종지마다 단단한 무게가 실렸고, 절제된 루바토는 이혁 음악의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의 음악엔 중력이 있었다. 오랜 시간 다져온 대지와 같았다. 어떤 선율도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모든 음이 하나의 방향으로 모아졌다. 절정 역시 치밀하게 계산된 궤적을 따라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흐르는 프레이즈, 흐트러짐 없는 리듬의 지속은 잘 설계된 논리 구조를 보는 듯한 지적 쾌감을 안겼다
이효는 쇼팽의 ‘스케르초 4번 마장조(Scherzo No. 4 in E major, Op. 54)’는 정반대의 음향적 풍경을 연출했다. 쇼팽의 네 개 스케르초 중 유일한 장조곡인 이 작품은 가볍고 날아갈 듯한 기교와 섬세한 서정성이 공존하는 까다로운 곡이다.
그는 유연하고 경쾌했다. 타건을 건반 바닥 깊숙이 누르기보다 표면에서 미끄러지듯 튕겨내는 아티큘레이션을 쓰며 음색에 다채로운 빛깔과 입체적인 잔향을 입혔다. 이효의 연주는 악보의 규격에 갇히지 않는 재지(jazzy)하고 자유로운 감각을 들려줬다. 유려한 선율에 화려한 기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리듬은 기분 좋은 변덕처럼 다가왔다.
![피아니스트 이혁 이효 형제 [KBS교향악단 제공]](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26/ned/20260526213321300vfiz.jpg)
이효는 악보를 정교하게 재현하기보다 음악 안에서 자유롭게 거닐었다. 빠른 패시지에선 번뜩이는 기지가 느껴졌고, 노래하는 대목에서는 순간적으로 공기의 색이 달라졌다. 비 개인 어느 날, 대지 한 가운데로 내리꽂히는 한 줄기 햇빛처럼 찬란했다.
1부의 마지막 곡은 이효의 ‘스케르초’에 이어 다시 한번 그의 자유로운 감각이 빛났다. 거슈윈과 그레인저의 ‘포기와 베스 환상곡’을 연주할 때였다.
곡에선 형제의 장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혁이 뼈대를 세웠다면, 이효는 색채를 입혔다. 거슈윈 특유의 리듬이 살아나는 순간마다 이효의 자유로운 감각이 빛났다. 동생을 날아오르게 해준 것은 이혁의 안정감이었다. 서로 다른 성향은 충돌하지 않았다. 형제는 상대가 있었기에 각자의 강점이 선명해졌다. 잘 맞는 퍼즐처럼 두 사람이 주고받는 선율과 리듬마다 절묘한 스파크가 튀었다.
두 대의 피아노가 만드는 리듬과 에너지는 단순히 음량의 증폭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개성이 창출하는 입체적 사운드스케이프였다. 재즈적 리듬감과 블루스 색채를 구현할 때, 이혁의 직진의 해석과 이효가 만들어내는 선명한 음색의 세밀한 선율이 긴 호흡에서 감정을 쌓아 올렸다.
2부가 시작되며 두 사람은 자리를 바꿨다. 듀오 연주에서 고정된 위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배치전환을 통해 관객은 다른 각도에서 사운드를 경험하게 됐다. 사실 이러한 자리 이동은 아서 벤자민의 ‘6개의 카리브 소품’과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의 음악적 성격에 맞춘 ‘전략적 선택’으로 보였다.
![지난해 제 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세미 파이널에 나란히 진출하며 클래식 음악계에서 주목받은 ‘피아니스트 형제 이혁 이효 듀오 리사이틀 [WCN 제공]](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26/ned/20260526213321468loin.jpg)
첫 곡은 아서 벤자민의 ‘카리브해의 여섯 개의 소품’이었다. 생동감 넘치는 리듬과 이국적 색채가 특징인 작품이다. 형제는 리듬을 기계처럼 맞추지 않았다. 음악 안에 춤이 살아 있었고, 피아노는 타악기처럼 뛰어올랐다. 이효의 유연하고 생기 넘치는 재즈적인 선율과 즉흥적인 당김음 리듬을 이혁은 정밀한 타이밍에 받쳐주며 두 사람은 오차 없는 음악을 만들어갔다.
라흐마니노프에서 오케스트라의 육중한 더블베이스와 저음 금관악기 역할을 수행해야 했던 이혁은 제2피아노의 풍부한 울림통과 잔향을 극대화했다. 무대 뒤편에서부터 밀려오는 거대한 해일과 같은 심포닉한 저음의 파도가 콘서트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라흐마니노프가 시작되자 두 대의 피아노는 더 이상 건반악기가 아니었다. 저음 현악기의 울림과 금관의 포효, 팀파니의 타격감이 차례로 튀어나왔다. 형제는 마치 한 사람이 네 개의 팔을 가진 것처럼 움직였다.
광폭하게 몰아치던 에너지는 2악장에서 돌연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효가 빚어낸 선율은 허공에 길게 머물렀고, 이혁은 그 아래에서 흔들리지 않는 지반을 만들었다. 3악장에선 ‘진노의 날’ 테마를 활용한 종말론적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달았다. 두 사람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정밀한 통제를 동시에 보여줬다.
형제는 서로를 배려했지만, 자신을 해치진 않았다. 많은 듀오가 완벽한 일치를 목표로 하지만, 이날의 형제는 달랐다. 서로를 배려했지만 자신을 해치지는 않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하나의 음악 안에 존재했다.
두 사람은 닮지 않았기에 더 아름다웠다. 이혁은 음악이 뿌리내릴 수 있는 대지였고, 이효는 그 위를 비추는 햇살이었다. 한 사람은 구조를 세웠고, 다른 한 사람은 색을 입혔다. 쇼팽 콩쿠르는 형제를 세상에 알렸지만, 이날의 리사이틀은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 곁에 서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음악가이자 가장 강력한 음악적 동반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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