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 삶을 재구성하는 기억… 치유와 회복을 이루다
채팅으로 소통했던 친구를 보내며
존재의 의미와 관계의 미래 깨달아
나에게 오는 이야기에 열려 있고파
중학 시절, 채팅사이트를 통해 친구와 채팅을 했다.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서로 문자를 주고받고 가끔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다. 그 시절의 경험을 통해, 그는 얼굴을 대면하지 않아도 채팅만으로 누군가를 만날 수 있고 마음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린 시절 채팅사이트를 통해 소통했던 친구를 떠나보내며 자신의 존재 의미와 관계의 미래를 깨달아 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제2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인 성수진 작가의 장편소설 ‘유리 조각 시간’(나무옆의자)이 출간됐다.
작품은 심사위원단으로부터 “평범한 장면을 매혹적으로 만들어내는 디테일의 힘과 소설 읽는 행위 자체를 서사의 중심 장치로 삼은 구조가 특히 인상적”이라며 “드물게 자기 목소리를 지닌 작품”이라고 호평받았다.

경진이 쓴 문장들은 유영을 상처투성이의 어린 시절로 이끈다. 중학생 때 유영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와 건너편의 타워에 매혹된다. 타워를 응시하며 자신이 태어나기 전 세상을 떠난 언니 유경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유영은 채팅 사이트에서 ‘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경진을 만난다. 두 사람은 학교 소풍 날 기이한 경험을 공유하며 가까워진다.
“델의 치마 주머니에 손을 넣어봤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아 반대편 주머니도 뒤적거렸다. 작고 날카로운 뭔가가 느껴졌다. 꺼내어 보니 초록색 유리 조각이었다. 소주병 조각 같았다. 난간 앞에서 팔을 크게 휘두르며 그것을 던져버렸다.”
유영은 어느 순간 경진의 소설에서 불길함을 읽고 그가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간다. 경진은 유영에게 바다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지만, 과거에 외출을 허락했던 환자가 중태에 빠지는 일을 겪은 유영이었기에 선뜻 결정하지 못한다. 결국 외출은 무산되고, 경진은….
유영과 경진이 함께한 시간과 함께, 출국을 앞둔 유영이 본가에서 지내며 엄마를 비롯한 가족과 마주한 시간은 소설의 또다른 중요한 축을 이룬다. 유영은 자신을 붙잡아 두려는 엄마와 부딪히면서도, 엄마와 할머니와의 끊어진 관계를 잇기 위해 애쓴다. 유영과 엄마, 엄마와 할머니 두 모녀의 관계는 조금씩 변해 가는데.
요컨대 작품은 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통해 불안과 결핍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기억이 어떻게 삶을 다시 구성하는지를 파고든다. 아울러 두 인물이 소설을 쓰고 읽는 행위를 통해 공감과 위로, 치유와 회복이라는 문학의 힘을 일깨우는 데 성공한 듯하다.
1987년 수원에서 나고 자란 성수진은 2024년 단편소설 ‘재채기’를 한겨레출판 앤솔러지 ‘셋셋 2024’에 발표하고, 같은 해 단편 ‘눈사람들, 눈사람들’로 제1회 ‘림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세계문학상 수상작 ‘유리 조각 시간’은 그의 첫 장편소설.
성 작가는 수상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쉬지 않고 계속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며 “저한테 다가오는 이야기를 발견하려면 열려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다”고 포부와 다짐을 밝힌 바 있다. 그 포부와 다짐은 경진의 손을 거쳐 유영의 손에 들린 초록색 유리 조각 앞에서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할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가방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손바닥에 유리 조각을 두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소주병 혹은 사이다 병이 깨지고 나 뒤의 시간을 짐작해 보았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모래사장에서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서서히 마모되어온 시간을. 수많은 모래알 사이에서 나는 초록으로 빛나는 작은 유리 조각 하나를 주워 경진에게 건네었고, 오랜 시간이 흘러 경진은 그것을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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