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 배출한 인물 가운데, 시대의 격랑 속에서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음에도 역사적 평가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이름이 있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이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한국사 교과서에도 그의 행적은 비중 있게 다뤄진다. 항일 무장단체 '의열단'의 수장으로 일제 요인 암살과 주요 기관 파괴 공작을 주도했으며, 임시정부 산하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 총대장을 지냈다. 의열단의 거듭된 의거는 일제 식민통치의 핵심 기관들을 겨냥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김원봉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월북과 북한 정권 참여로 이어진 행적은, 독립운동의 공적과 맞물려 오늘날까지 평가가 엇갈리는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다.
◇밀양이 키운 독립운동가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라는 짧은 대사는 대중의 가슴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이 영화는 김원봉이라는 이름을 전 국민에게 다시 소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고향인 밀양시 내이동 생가 터에 의열기념관이 건립됐고, 인근 해천 주변에는 항일운동 테마거리가 조성됐다.
유학자 김종직의 절개와 사명대사의 호국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온 이 고장에서, 소년 김원봉은 일찍이 식민지 현실 앞에 눈을 떴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해천 일대는 청년들이 어깨를 맞대고 독립의 꿈을 키운 곳이었다. 밀양읍성 바깥을 흐르며 해자 역할을 한 이 자연 하천 주변은 훗날 26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며 '항일의 성지'로 불리게 된다. 이곳에서 싹튼 우정은 조국을 위해 함께 목숨을 내건 단단한 연대로 이어졌다.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전홍표 선생이 사재를 털어 세운 동화학교에서 항일 정신을 키워가던 김원봉은, 총독부의 압박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서울 중앙학교로 발길을 돌렸고, 이후 중국 텐진을 거쳐 난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1919년, 온 민족이 떨쳐 일어난 3·1 만세운동이 일제의 강경 진압으로 좌절됐다는 소식을 이국땅에서 접한 그는 평화적 시위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장 투쟁의 길을 결심했다.
곧바로 만주 길림으로 향한 그는 고모부이자 사상적 스승이었던 황상규의 지도 아래 신흥무관학교 출신 동지들을 모아, 1919년 11월 의열단을 창단하며 초대 단장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스물한 살이었다.
의열단은 단순한 무장 투쟁 조직이 아니었다. 창단 당시 '공약 10조'를 통해 왜적 구축·조국 광복은 물론 계급 타파·토지 균분이라는 이상을 내걸었고, 1926년 발표한 '20개조 강령'에는 봉건제 폐지와 여성 평등권, 보통선거권, 언론·출판의 자유 등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내용이 담겼다.
이준설 의열기념관 학예연구사는 "독립 이후 건설할 새 나라의 모습까지 치밀하게 구상했다는 점에서, 의열단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넘어선 혁명 조직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원봉
◇조선혁명선언에서 광복군까지
김원봉의 항일 궤적은 길고도 치열했다. 의열단은 창단 이후 1926년 나석주 의사의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까지 국내외에서 20여 차례 의거를 이끌었다.
이 학예연구사는 의열단의 역할을 '거대한 불을 지피기 위한 불씨'에 비유했다. 개별 의거만으로 독립을 앞당길 수 없다는 한계를 알면서도 전장으로 뛰어든 것은, 자신들의 희생이 도화선이 되어 온 겨레의 항일 의지를 일깨우길 바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의거가 거듭될수록 단순한 무장 행동을 넘어 사상적 토대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김원봉은 단재 신채호에게 의열단의 이념과 노선을 담은 글을 청했고, 그 결과물이 1923년 1월 발표된 '조선혁명선언'이다. 단원들은 이 6000자 분량의 선언문을 늘 품에 지니고 의거에 나섰다고 전해진다.
1926년 김원봉은 노선을 전환한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제안을 받아 광저우의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해 정식 장교 자격을 취득하고, 1932년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150여 명의 정예 투사를 길러냈다. 개인의 의거를 넘어 조직적 군사 투쟁으로 독립운동의 무게중심을 옮긴 것이다.
1935년에는 좌·우파 독립운동 세력이 처음 손을 맞잡은 민족혁명당 창립을 주도했고, 1938년 10월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으로 최초의 한인 정규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총대장에 올랐다.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을 이끌며 항일 무장투쟁에 함께 나선 아내 박차정(1910~1944)도 이 시기 그와 함께했다.
1942년 5월,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키며 스스로 광복군 부사령관으로 합류했다. 3·1운동에서 의열단, 조선의용대를 거쳐 광복군에 이르는 독립운동사의 주요 흐름이 한 사람의 생애에 고스란히 집약된 것이다.
이 학예연구사는 "밀양의 독립운동은 3·1만세운동에서 광복군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주도한 유일한 지역"이라며 "그 중심에 김원봉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분단이 지운 이름
1945년 8·15 광복의 함성 속에 김원봉은 30여 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미국(남)과 소련(북)의 군정 체제 아래 좌우 이념 대립이 극도로 격화되고 있었다. 김원봉은 좌우 합작과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으나, 이 노선은 양쪽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고 그의 정치적 입지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1947년 3월, 그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총파업의 배후로 지목돼 친일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체포돼 조사를 받는 일을 겪었다. 이어진 정치적 반대 세력의 살해 위협 속에, 같은 해 7월 통일정부 수립을 함께 모색하던 몽양 여운형마저 서울 거리에서 피살됐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김원봉은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계기로 월북을 선택했다.
북한에서 그는 국가검열상·노동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6·25 전쟁 당시에는 전쟁 수행에 관여했으며, 1954년 당시 언론 보도에서는 체포된 간첩의 진술을 근거로 남한 내 경제 혼란과 선거 방해를 목적으로 한 남파 간첩단을 지휘했다는 내용이 제기됐다.
오늘날 그의 북한에서의 실질적 권한과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논란이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관련 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이 시기 행적을 온전히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원봉은 전쟁이 끝난 뒤 김일성이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1958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열단 단장에서 조선의용대 총대장,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이르기까지 항일 독립운동의 주요 국면마다 중심에 섰던 인물. 그러나 해방 이후의 행적은, 그에 대한 평가를 단순하게 내리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행적은 서훈 문제로도 이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거나 적극 협력한 자는 서훈에서 제외한다'는 기준에 따라 김원봉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의 공적과 해방 이후의 행적을 어떻게 균형 있게 바라볼 것인지는 우리 사회가 아직 온전한 답을 내리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