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군부인’ 폐기가 정답? [미디어 전망대]

한겨레 2026. 5. 26.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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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에서 이안대군(변우석)이 구류면류관을 쓴 모습. 이안대군은 즉위식 장면에서 자주국의 황제가 쓰는 십이면류관 대신 제후국에서 사용하는 구류면류관을 쓰고 신하들은 황제에게 외치는 ‘만세’ 대신 제후국이 쓰는 ‘천세’를 외쳤다. 온라인 커뮤니티 갈무리

천현진 | 국립순천대 애니메이션문화콘텐츠스쿨 학술연구교수

역사와 재미를 동시에 담아내는 사극은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르다. 최근에는 퓨전에 판타지 요소가 더해지면서 실존 인물이 새롭게 해석되고,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가 드라마 속에 펼쳐진다. 잘 만든 사극은 한 시대의 감각을 되살리고 우리 사회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명품’ 반열에 오르지만, 아차 하는 순간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재미와 풍성한 이야기를 위해 사료 한줄에 상상력이 보태지면서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거나 미화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

최근 종영한 ‘21세기 대군부인’도 역사 왜곡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입헌군주제가 유지되는 가상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이 로맨스극은 분당 최고 시청률 13.8%를 기록할 만큼 대중의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나 구류면류관, ‘천세’ 연호, 왕실 의례와 호칭, 복식 등 역사적 상징의 사용 방식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거센 후폭풍을 맞았다. 이전 회차의 설정과 장면들까지 ‘파묘’되었다.

가상의 세계관이라 해도 현실의 역사를 빌려오는 순간 일정한 역사적 책임이 따른다. 시청자들이 문제 삼은 것도 바로 이점이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로 콘텐츠가 유통되는 시대에 한국의 역사와 정체성을 둘러싼 장면이 허술하게 재현되는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블록버스터급 드라마를 만들면서 작가부터 제작사, 전체 제작진 가운데 누구도 이 문제를 사전에 걸러내지 못했다는 점은 더욱 놀랍다.

급기야 지난 5월22일 국회 국민동의 청원 게시판에는 해당 드라마의 즉각적인 방영 중단과 주문형 비디오(VOD)·오티티 플랫폼 내 전면 폐기를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다. 사흘 만에 90% 넘는 동의율을 기록했다. 일부 중국 누리꾼들은 “너희는 원래 속국이 맞았다”는 조롱을 쏟아냈다. 단순한 고증 실수가 빚은 촌극으로 치부하기에는 파장이 컸다.

콘텐츠는 문화적 산물이자 시장 상품이다. 제작사는 시청률, 화제성, 글로벌 유통 등을 고려해 막대한 자본을 투입한다. 상업적 성공을 좇는 미디어 자본은 화려한 시각적 스펙터클과 한류 스타 캐스팅에 300억원이라는 제작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의 뼈대가 되는 세계관 설계와 역사 고증, 문화적 검증에는 소홀했다. 제작비의 규모가 곧 완성도를 보증하지 않는 이유다. 수백억원의 제작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세계가 시청자를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정교하게 구축되었는가다.

과거 수동적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던 대중은 이제 없다. 시청자들은 면류관의 줄 수를 세고, 호칭의 의미를 따지고, 장면을 캡처해 역사적 맥락을 검증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미디어, 청원 게시판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제작진의 사후 조치를 요구한다. 콘텐츠 권력은 더 이상 제작사와 방송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이 말한 ‘능동적 수용자’는 이제 해석을 넘어 집단 지성으로 무장한 ‘문화 감시 권력’으로 부상했다. 무비판적인 미디어 자본을 통제하는 가장 강력한 견제 장치는 깨어 있는 시청자였다.

그렇다고 답이 폐기일 수는 없다. 제작진의 사과와 문제 장면의 묵음 처리, 자막 삭제 같은 사후약방문식 땜질로 본질을 덮을 수 없다. 케이(K)-콘텐츠의 장면 하나하나가 글로벌 플랫폼을 타고 세계인의 일상과 무의식에 스며드는 지금, 우리의 문화적 자본은 얼마나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외형적 인기와 팽창에 도취해 그 뿌리가 곪아가는 것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진정한 글로벌 스탠다드는 천문학적인 제작비와 화려한 캐스팅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스스로의 역사와 정체성을 얼마나 정교하게 이해하고 다루며 지키는가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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