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광주 너머 5·18] 항쟁 그후, 전두환 대통령 취임…유족 ,대학생 진상규명 투쟁 벌여
김의기, 김종태, 김태훈 온몸 항거

"광주 시민 여러분! 이젠 안심하십시오. 계엄군이 폭도들을 완전 소탕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상무충정작전'으로 전남도청을 진압한 직후 광주 시내에는 이러한 내용의 차량 방송이 흘러나왔다. 계엄군은 이날 오전 4시께 도청에 진입해 시민군을 진압했고, 열흘간 이어진 5·18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당시 계엄사가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정당화'였다. 계엄사는 "김대중이 광주 사태의 배후이며 시민들을 조종했다"고 발표하며 강경 진압의 불가피성을 주장했다. 또 광주 관련 피해 규모는 사망 170명, 부상 280명, 연행 1천740명이라고도 했다. 항쟁 진압 이틀 뒤인 5월 29일 정부는 상무관에 안치됐던 희생자 시신 126구를 청소차량 등에 실어 장례 절차 없이 망월동 묘지에 매장했다.
이후 신군부는 통제 수위를 높였다. 같은 해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출범시켰다. 국보위는 사회정화와 국가 안정을 내세웠고, 이후 신군부의 권력 장악 기구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8월부터는 폭력배 소탕과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삼청교육대 운영이 시작됐다. 같은 해 9월 1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11월에는 언론 통폐합 조치가 단행되면서 언론인 대규모 해직도 이어졌다.

유가족과 구속자 가족들은 감시 속에서도 모임을 이어갔다. 1980년 5월 말 유가족들은 '5·18광주의거유족회'를 결성했고, 이후 구속자 가족들은 '5·18구속자가족협의회'를 꾸려 석방 운동과 탄원 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군과 경찰의 감시를 피해 모임 장소를 바꿔가며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가족들은 명동성당과 미국문화원 등에서 농성을 벌였고, 사형수 구명 운동과 혈서 탄원 활동도 이어갔다. 유가족들은 오랜 기간 '폭도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전국적으로 광주의 희생에 애도를 표하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1970년대 반유신 운동을 벌였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1980년 5월 28일 광주 관련 성명을 발표했다. 5월 30일에는 서강대생 김의기가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투신했다.
그는 유서에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적었다. 6월 9일에는 성남지역 노동자 김종태가 서울 이화여대 앞 사거리에서 '광주학살 책임'을 언급한 유인물을 뿌린 뒤 분신했고, 닷새 뒤 숨졌다. 다음 날인 6월 10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광주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고, 경찰은 신부 8명을 연행했다.
학생사회에서도 진상을 알리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1980년 9월 개강 이후 대학가에서는 유인물 배포와 벽보 게시가 이어졌다. 광주항쟁 기록을 담은 '광주백서'가 비밀리에 유통됐고, 황석영의 이름으로 출간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도 학생사회에 퍼져나갔다. 같은 해 12월 9일 대학생들과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은 광주 미국문화원에 불을 질렀다. 당시 일부 학생·재야 세력은 미국 책임론을 제기하며 반미 시위를 벌였다.
1981년에도 추모 움직임은 이어졌다. 5월 18일 첫 5·18 추모제가 추진됐지만 경찰 저지로 무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달 27일 서울대생 김태훈은 서울 도서관 건물에서 전두환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투신했다.
/ 임지섭 기자 lj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