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에 밀렸다더니…곰고기까지 뽑아 먹는 일본의 반전 [김현주의 재팬코드]

2023년, 한국은 일본의 곰고기 자판기 소식으로 한바탕 떠들썩했다. 야생 곰고기부터 고래고기까지. 기상천외한 이색 자판기가 연이어 등장하는 일본을 두고 '자판기 강국'이라는 말이 새삼 실감 났다.
그런데 이 소동의 이면에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자판기 시장이 진화하는 동력은 단순히 '무인'이라는 편의성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자판기를 어떻게 운영하고, 어떤 고객 경험을 설계하며, 어떤 방식으로 브랜드와 지역을 마케팅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 콘텐츠의 힘에서 비롯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비대면 소비와 접촉 최소화를 선호하는 라이프스타일이 자리 잡으면서 자판기 보급 속도는 한층 빨라졌다. 그리고 그 이후가 더 주목할 만하다. 단순히 늘어나는 것을 넘어, 각각의 자판기가 뚜렷한 콘셉트를 입기 시작했다. 식품의 경우 하나의 '미식 경험'을 제공하는 제2의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고, 식품을 넘어 지역 특산품, 라이프스타일 굿즈, 아로마 제품까지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반경을 넓혀가고 있다. 다양한 콘셉트의 일본 자판기들을 들여다 봤다.
자판기 왕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좌] 1962년 처음 보급된 코카콜라 자판기 [우] 1970년 지금의 형태로 발전한 코카콜라 자판기 / 사진제공. Coca‑Cola (Japan) Company, Limited](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26/ked/20260526091955722ryjz.jpg)
일본이 '자판기 천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60년대 코카콜라 자판기가 거리에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이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1970년대 들어 각종 캔음료가 쏟아지고 동전이 대량 유통되는 시기가 맞물리면서 자판기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자판기 한 대를 두는 것은 가게 하나를 여는 것과 같다"는 말이 거리에 돌 정도였다.
전성기는 2000년이었다. 당시 일본 전국의 설치 대수는 560만 대. 국민 23명당 1대꼴이었다. 낮은 범죄율 덕분에 주인 없는 기계가 골목에 홀로 서도 부서지거나 털리지 않았다. 현금 결제 문화는 동전을 처리할 가장 자연스러운 수단으로 자판기를 정착시켰다. 일본 특유의 장시간 노동 문화는 퇴근길 지친 직장인에게 24시간 열려 있는 자판기를 삶의 동반자로 만들었다. 자판기는 편의시설이 아니라 사회 인프라였다.
어디까지 먹어봤니? 지역 명물 자판기들

음료가 전부가 아니다. 일본의 자판기는 진작부터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군마현 고속도로 인근의 나나코시 휴게소(드라이브인). 1970~80년대 감성의 낡은 자판기에서 즉석 우동과 라멘, 토스트가 나온다. 기계는 낡고 느리고 버튼은 투박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투박함이 SNS를 타고 퍼졌다. 중장년에게는 잊고 살던 향수를, Z세대에게는 처음 보는 아날로그 감성을 건드린다. 일본어로 "에모이(エモい)", 감성적이라는 뜻이다. 전국에서 레트로 자판기를 찾아 순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NHK 다큐멘터리까지 다녀간 군마 레트로 자판기 지역은 지금 하나의 관광 루트가 됐다.

90년 역사의 테이크아웃 스시 전문점 '교탄(京樽)'은 2022년 냉동 스시 자판기를 처음 선보였다. 찻잎으로 싼 전통 스시 '차킨즈시'를 급속 냉동해 자판기에 넣고 24시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자레인지로 데우면 갓 만든 것처럼 부드럽게 살아난다는 반응에 힘입어 회전초밥 체인 스시로와 협업하며 설치 매장을 늘렸다. ‘가게에 가지 않아도’가 아니라, 어쩌면 ‘가게에 가기 전에 먼저 맛보는’ 입구가 된 것이다.

JR동일본은 이를 더욱 전략적으로 활용한다. '후루사토 아큐아(ふるさとアキュア)' 프로젝트를 통해 역 안 자판기를 지역 특산품을 퍼뜨리는 역할로 탈바꿈시켰다. 군마현 미나카미마치의 벌꿀과 아로마 제품이 도쿄역 자판기에서 나오고, 오미야역에서는 후쿠시마 천영촌의 '세계 최고 쌀'이 판매됐다.
"작은 안테나샵"이라고 불리는 이 자판기는 지역 자치체의 참가 신청을 공개 모집할 만큼 하나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오미야역의 또 다른 자판기는 세계 각국 항공사 기내식과 스테디셀러 역도시락을 나란히 담았다. 여행의 출발점인 역에서 하늘 위의 식사를 미리 만나는 이 조합은 통근객보다 여행자들의 발길을 잡아끈다.

그리고 가장 따뜻한 장면은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모지코에 있다. 관문해협이 보이는 이 레트로한 항구 마을은 야키카레(焼きカレー)로 유명하다. 카레 위에 치즈와 달걀을 얹어 오븐에 구워낸 이 요리는 1950년대 모지코의 한 찻집에서 남은 카레를 그라탕 방식으로 처리한 것이 시작이었다. 항구 노동자들의 끼니에서 출발해 지금은 모지코 지구에서만 40개 이상의 가게가 각자의 방식으로 선보이는 도시를 대표하는 음식이 됐다.

사카에마치 상점가의 작은 주류 판매 매장인 'SHIMADA' 앞에는 자판기 두 대가 가게 앞을 지킨다. 야키카레를 비롯해 국산 참복 회 세트, 이마리규 된장 호르몬, 지역 디저트(스위츠)가 담겨 있었다. 캔과 같은 상품이 아닐 경우 당일 메모와 함께 메뉴가 바뀌는 것도 특징이다. 여행자가 늦은 밤 도착하더라도, 폭풍우로 가게 문이 닫힌 날에도, 이 도시의 맛과 첫인사를 나눌 수 있다.
이 자판기를 기획한 것은 코로나 시기 때문이었다. 관광객들이 찾아왔다가 가게 문이 닫혀 발길을 돌리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고 그는 '잠들지 않는 상점가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주변 점포들의 대표 메뉴들을 넣어둔 냉동자판기를 설치해 관광객들에게 경험을 주는 것이다.
그는 "이 자판기 음식을 먹어보고 맛있다고 느꼈다면, 다음엔 직접 그 가게에 가줬으면 한다. 모지코는 좋은 동네고, 여기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강조했다. 자판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골목으로 향하는 프롤로그라는 역발상. 이런 자판기 두 대만으로 도시의 대표 음식과 지역 상인의 이야기를 24시간 전달할 수 있었다.
변화의 길목에 선 자판기 왕국

음료 자판기가 다양한 플랫폼으로 변모한 배경은 산업의 호황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2024년 기준 일본 전국의 자판기 설치 대수는 204만 대다. 2013년 정점 대비 20% 감소했고, 현 추세라면 2050년에는 100만 대 수준으로 절반이 줄어들 것이라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망했다. 음료 판매량은 더 가파르게 꺾였다. 2024년 자판기 음료 판매량은 4200만 상자로, 정점이던 1997년(7200만 상자)의 58퍼센트 수준에 그친다.
무엇이 자판기 왕국을 흔들었을까? 바로 편의점, 물가 상승 그리고 사람 부족이다. 음료 자판기의 판매가는 인근 편의점보다 평균 20퍼센트가량 비싸다. 3년간 이어진 물가 상승으로 소비자들이 지출을 줄이자 그 가격 차이가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자판기는 판매 과정만 자동일 뿐, 상품 보충과 재고 관리는 여전히 사람이 발로 뛰어야 하는 구조다. 2024년 트럭 운전기사 연장 근무 규제 시행 이후 물류 인력 확보가 더 어려워졌고, 현장의 인력난은 깊어졌다. 리테일 분석가 나카이 아키히토는 "자동화된 것은 판매 과정뿐이다. 어떤 상품이 팔렸는지 사람이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데이터를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업계 3위 다이도 그룹은 최근 사상 최대의 연간 손실을 기록한 뒤 전체 27만 대 가운데 2만 대를 철거하기로 했다. 다카마쓰 도미야 사장은 "자판기 사업이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현재 최우선 과제는 출혈을 멈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숫자가 있다. 식품 자판기는 2024년 말 기준 8만 1200대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음료 자판기가 빠져나간 자리에 더 다양하고 더 지역적인 것들이 채워지고 있다. 기계는 줄어들고 있지만 콘텐츠는 더 풍부해지고 있다.
한국도 이미 시작됐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한국에서도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무인 라면 판매점, 셀프 계산대는 이미 일상이 됐다. 인건비 상승, 인력 부족, 비대면 소비 선호. 일본이 자판기 왕국을 만든 조건과 놀라울 정도로 겹친다.
차이가 있다면 아직 한국의 무인 판매는 '편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반면 일본이 최근 실험하고 있는 것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지역 명물을 담고, 지역의 이야기를 싣고, 소비자를 그 지역으로 이끄는 발신 플랫폼이다. 서울역에서 제주 한라봉 착즙 주스를 만나고, 부산 노포의 어묵을 집으로 가져가고, 전주 비빔밥 밀키트로 주말 저녁을 차리는 풍경은 그리 먼 미래가 아닐지 모른다. 자판기 한 대가 지역 소상공인과 연결되고, 소비자를 그 골목으로 이끄는 입구가 되는 방식. 일본이 먼저 걷고 있는 이 길에서 배울 것이 있다.

도쿄의 역 앞 자판기에서 쌀을 사고, 오미야역에서 기내식을 맛볼 수 있고, 모지코의 골목 자판기에서 야키카레를 맛본 뒤 다음 여행지를 마음속에 저장한다. 버튼 하나를 누르는 행위는 더 이상 단순한 구매가 아니다. 지역의 맛을 미리 경험하고, 그 도시를 기억하고, 언젠가 직접 그 골목을 찾아가게 만드는 작은 예고편에 가깝다.
자판기 왕국의 전성기는 지났다. 그러나 자판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더 지역적이고, 더 입체적이며, 더 인간적인 플랫폼으로. 일본의 자판기는 지금 진화의 한가운데 있다. 당신은 이 작은 버튼 하나로, 어디까지 여행할 수 있을까.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스펀지처럼 쭉 흡수"…의사가 꼽은 공복에 먹어야 할 음식 [건강!톡]
- "연봉 1억3000만원에 모십니다"…세종에 '신의 직장' 생긴다 [김익환의 부처 핸즈업]
- "카와이" 열광한 日 팬들…외국인 줄 서는 '한글 과자' 정체
- "췌장 13cm 잘라냈다"…의사가 경고한 최악의 음식 3가지 [건강!톡]
- 입사 5년차부터 이직 막힌다…'신의 직장' 직원들 부글부글
- "또 일본 갈 줄 알았는데"…5월 황금연휴 1위 여행지 어디?
- CIS, 첨단 정밀 장비로 日 배터리 업체도 홀렸다
- "한국에 최우선 공급하겠다"…중동 6개국 '깜짝 선언'
- "호텔서 커피 마셨더니…" 조회수 '300만' 대박 영상의 비밀 [현장+]
- "32만전자 간다"…삼성전자, 역대급 잭팟 예고에 주가 '들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