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AI 패권 시대, ‘이건희’를 읽어야 하는 이유

그런데 같은 시간, 회사에서는 성과급을 둘러싼 갈등이 불거졌다. 노사 합의로 일단락됐지만, 바깥에서는 기대가 치솟고 안에서는 긴장이 고조되는 국면이 한동안 이어졌다. 생전에 '상생의 정신'을 유난히 강조했던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만약 살아 있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마침 그 의문을 풀어줄 두 권의 책이 출간됐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1·2권이다. 1권 '생각―AI와 로봇 세상을 예견한 미래설계자' 편은 2021년 나온 초판을 기초로 5년간의 추가 탐사 취재 내용을 덧붙여 전면 증보한 책이다. 2권 '행동―세상을 바꾸다: 반도체부터 반려견까지' 편은 이번에 새로 내놓은 신간이다.
이건희는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읽었는가
이 책의 첫인상은 '의외'다. 삼성전자의 성공담을 기대하고 펼치면, 책은 곧바로 다른 방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필자가 굳이 "위인전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삼성을 어떻게 키웠는가'보다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읽었는가'다. 이 전 회장을 기업 총수로만 보지 않고, 시대 징후를 먼저 감지하려 한 '선지자' 자리에 세워보려는 시도다. 그가 남긴 말과 기록, 주변 증언들은 모두 다음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그는 왜 늘 남들보다 먼저 불안해했는가, 그리고 그 불안을 어떻게 생각의 연료로 바꾸었는가.30여 년 전, 이 전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반도체 패권 시대가 온다" "자동차는 바퀴 달린 컴퓨터가 된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가 온다. 그때는 인간의 창의성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먼 미래 이야기 같던 그의 예언은 이미 모두 현실이 됐다. 특히 이 전 회장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강연 중 한 이 발언은 마치 오늘 아침에 이야기한 것 같다.
"5000년 전부터 1980년까지 이뤄진 변화보다 1980년부터 1993년까지 변화가 더 컸다. 향후 10~20년의 변화는 더욱 클 것이다. 인간이 바뀐다는 게 아니라 경제 제도, 시스템, 판단 속도, 정보 습득 방법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의 서재에는 경영학 서적 대신 미래 과학, 전자, 우주, 항공, 자동차, 엔진 공학 관련 서적이 가득했다. 그에게 탁구를 가르쳤던 박성인 전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은 "몇 날 며칠 방에서 나오시지도 않고 생각에 골몰해 뵙지도 못한 채 나온 날들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삼성 경쟁력 끌어올린 이건희식 질문법
지금은 AI가 세상을 바꾸는 대전환 시대다. 기술 발전 속도는 숨이 가쁠 정도로 빠르고, 산업은 끊임없이 재편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라 더 깊은 생각이다.1권 생각 편에는 변화하는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이 전 회장의 통찰과 지혜, 그리고 위기를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특히 책에는 이 전 회장이 1995년에 직접 쓴 '나는 왜 신경영 선언을 했나'라는 제목의 원고 전문이 실렸다. 저자는 이 글을 "이건희식 경영전략을 넘어 '문명적 전환에 대한 선언'이라고까지 말하고 싶다"고 평가한다.
이 전 회장의 언어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자신감보다 긴장감이다. 그는 늘 변화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 봤고, 현재의 우위가 곧바로 미래의 우위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의식했다. 오늘날 삼성전자가 AI 메모리에서 다시 힘을 받는 동시에 첨단 로직과 파운드리에서 고객 확대라는 과제를 안고 있고, 노사 갈등이라는 내부 압력까지 겪고 있다는 현실은 그런 문제의식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 기업의 현재는 늘 2개의 얼굴을 갖는다. 눈앞의 '성과'와 아직 끝나지 않은 '불안'이다.
2권 행동 편에서는 그 불안이 현실에서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났는지를 보여준다. 반도체만이 아니다. 디자인과 스포츠, 안내견 사업이 함께 등장한다.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세계다. 하지만 책은 그 이질적인 장면들을 한 줄로 꿰어낸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 경영의 언어였고, 스포츠는 메달 집계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구조의 문제였으며, 안내견 사업은 자선의 차원을 넘어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문화적 실천이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결국 이긴다"는 이 전 회장의 말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과 감성, 기능과 인간을 함께 봐야 한다는 선언에 가깝다. 이건희를 '반도체의 승부사'로만 기억하면 놓치게 되는 대목이다.
특히 안내견 사업을 다루는 부분은 이 책의 결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시각장애인 안내견 사업은 기업 이미지 개선용 이벤트가 아니었다. 책은 그것을 사람에 대한 이해, 생명에 대한 감각, 사회를 바꾸는 방식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실천으로 읽는다. 반도체와 안내견, 디자인과 스포츠는 서로 다른 분야가 아니라, 아직 세상이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가치를 먼저 보고 그 가치를 현실 구조로 바꾸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연결은 다소 뜻밖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생각의 폭이 좁으면 사업의 폭도 좁아진다. 경영에서 상상력이란 결국 세상을 어떤 단위로 보느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책은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긴장은 사람을 위축하게 하는 공포라기보다 조직 전체를 깊은 사고로 밀어 넣는 압력에 가까웠다. 답을 빨리 내는 능력보다,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능력. AI가 정보 접근의 문턱을 무너뜨린 시대일수록 더 귀해지는 것은 어쩌면 바로 그 능력인지도 모른다. 정보는 많아졌지만, 본질을 겨냥하는 질문은 오히려 더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무엇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가다. AI 메모리 호황으로 치솟는 기대, 1조 달러를 넘긴 시가총액, HBM4 출하, 파업 가능성까지 이어지는 내부 긴장… 오늘의 삼성전자는 찬사와 불안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래서 지금 다시 이건희를 읽는다는 것은 '과거 인물'을 회고하는 일이 아니라, 불안과 절박감을 어떻게 사유와 결단의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지를 묻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 가깝다.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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