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그늘에 갇힌 생활임금

생활임금제도는 법정 최저임금이 노동자의 실질적인 생활을 보장하기에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2013년 서울 노원구·성북구의 행정명령과 이듬해 경기 부천시의 조례 제정을 계기로 확산된 이래, 2026년 3월 현재 전국 243개 지자체 가운데 131곳(53.9%)이 조례를 제정하고 124곳(51.0%)에서 실제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 생활임금은 일부 진보 지자체의 실험을 넘어 전국적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올해 초 진행한 전국 243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진행한 정보공개 청구 결과를 들여다보면 그 외형 아래에는 '보편화된 제도, 정체된 내실'이라는 역설이 짙게 깔려 있다.
제도는 보편화, 내실은 정체
적용범위 한계, 비민주적 결정
첫째, 임금 수준의 정체다. 전국 평균 생활임금은 2018년 시급 8천746원에서 2025년 1만1천569원으로 32.3% 상승했으나, 같은 기간 최저임금 인상 폭(33.2%)에 오히려 미치지 못한다. 최저임금 대비 비율도 분석 기간 내내 114~117% 수준에서 정체돼 있어 '준 최저임금'이라는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 본질적인 문제는 산정방식에 있다. 노동자 가구의 실질적인 가계지출을 직접 산정하는 '가계지출 기준형' 지자체는 분석 대상 90곳 가운데 10곳(11.1%)에 그친 반면 어떤 형태로든 외부지표 인상률 연동 방식을 채택한 지자체는 81곳(90.0%)이나 된다. 한때 '서울형 가계지출모델'을 운용하던 다수 서울 자치구조차 최근 '최저임금 인상률 반영'이라는 짧은 문구로 산정방식을 갈음하고 있다. 생계비 모형은 후퇴하고 최저임금 인상률 연동이 사실상의 표준이 된 결과 생활임금은 가족의 생계를 보장하는 임금이 아니라 최저임금에 묶여 있는 부속 지표로 전락하고 있다.
둘째, 적용범위의 한계다. 위탁·용역 노동자 등 간접고용 노동자까지 포괄하는 지자체가 2019년 55곳에서 2025년 87곳으로 늘었고, 수혜 노동자 규모도 약 6만6천명에서 약 14만명으로 약 2.1배 증가했다. 그런데도 전체 지자체의 약 3분의 1은 여전히 지자체와 출자·출연기관의 직접고용 노동자만 적용 대상으로 삼는다. 대전의 경우 6개 지자체 중 5곳이 그러하며, 부산 등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확인된다. 한편 "적용범위를 넓히면 재정 부담 때문에 인상률이 둔화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지만, 조사 결과는 정반대였다. 2025년 기준 적용범위가 가장 좁은 유형의 평균 시급은 1만1천331원인 데 비해 위탁·용역과 하수급 노동자까지 포괄하는 유형의 평균은 1만1천864원으로 533원 더 높았다. 결국 적용범위와 임금 수준은 '제로섬' 관계가 아니라, 해당 지자체가 생활임금제도 자체에 얼마나 적극적이냐를 함께 드러내는 상호 연관된 지표였다. 적용범위를 빌미로 한 인상률 억제 논리는 핑계에 불과하며, 핵심은 지방정부의 정책적 의지라는 점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셋째, 결정구조의 비민주성이다. 생활임금위원회 109곳을 분석한 결과, 노동자위원이 참여하는 위원회는 65곳(59.6%)에 그쳤다. 10곳 중 4곳에는 노동자위원이 아예 배제돼 있는 셈이다. 평균 위원 구성을 보면 외부 전문가 36.5%, 공무원 28.0%, 광역·기초의원 14.3%인 반면 노동자위원은 10.9%, 사용자위원은 10.4%에 그친다. 노동자위원이 배제된 위원회에서 외부 전문가 비중은 평균 50.0%까지 치솟는다. 생활임금이 노동자의 생활을 다루는 제도임에도, 정작 노동자의 목소리는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 생활임금위원회가 '이해당사자 참여형 협의기구'가 아니라 '전문가·공무원 중심의 심의기구'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지역 간 격차의 재확대다. 광역시·도청 간 최고-최저 격차는 2018년 시급 1천980원에서 2022년 1천661원까지 좁혀졌다가, 2025년에는 2천900원(월급 기준 약 60만원)으로 다시 벌어졌다. 같은 광역 내에서도 도청과 기초지자체의 간극이 1천600원을 넘는 곳(전북·강원)이 있다. 양적 보편화는 진행됐으나, 노동자가 어느 지역에 살고 일하느냐에 따라 받는 임금이 크게 달라지는 구조가 오히려 굳어지고 있는 셈이다.
지역 간 격차 다시 확대
최저임금 인상률 연동 안 돼
이상의 진단은 향후 과제를 명확히 가리킨다. 먼저 결정구조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노동자위원 참여를 의무화하되, 비율을 최소 30% 이상으로 보장하고 노사 이해당사자가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 분석 결과 노동자위원 비율이 20% 미만인 위원회는 노동자위원이 아예 없는 위원회와 평균 생활임금에서 사실상 차이가 없었다. 서울 제외 기준으로 노동자위원 배제 위원회 1만1천394원, 20% 미만 위원회 1만1천501원인 반면, 20%를 넘는 구간부터는 1만1천621원으로 의미 있게 높아졌다. 형식적 참여로는 전문가·공무원 중심 구조를 바꿀 수 없으며, 최소한의 교섭력이 확보될 때 비로소 발언권이 작동한다는 의미다. 현재 노동자위원 30% 이상인 곳은 광주광역시, 광주 광산구, 전남 목포시 세 곳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산정방식의 독자성 회복이다. 최저임금 인상률 연동에서 벗어나, 주거·식품·교통·의료·교육·문화비를 체계적으로 반영하는 생계비 기반 표준 산정모델을 광역 단위에서 개발·확산해야 한다. 광주의 '광주형 표준모델'이 시청과 5개 자치구에 통일적으로 적용돼 광역 내 격차를 없앤 사례, 충남도청의 상대빈곤기준선 모형 등은 적극 참고할 만하다. 광역시·도가 산하 연구원과 협력해 지역 생계비를 반영하는 표준모델을 만들고 소속 기초지자체와 공유한다면 지역 간 격차 해소도 함께 달성할 수 있다.
나아가 적용범위의 실질적 확대를 위해 생활임금을 공공계약과 결합할 필요가 있다. 지방정부가 발주하는 위탁·용역 사업에서 생활임금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제도는 반쪽짜리에 머문다. 공공조달·민간위탁·보조사업 입찰에 생활임금 준수 조건을 명시하고, 위반 업체에는 계약상 불이익을 부과해야 한다. 지방정부 예산으로 수행되는 일이라면 고용형태와 계약 단계에 관계없이 생활임금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아울러 비수도권 군 단위처럼 자체 역량이 부족한 지역에는 중앙정부의 모델 제공과 재정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 생활임금은 단순한 지자체 임금 행정의 한 항목이 아니라 미조직·취약 노동자에게도 단체교섭에 준하는 임금 결정 기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노동기본권의 확장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노동조합이 생활임금위원회 운영과 산정모델 개발, 적용 대상 확대 모니터링에 결합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를 함께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생활임금은 이제 도입 여부가 아니라 내실을 따져야 할 단계에 들어섰다. 결정구조의 민주성, 산정방식의 독자성, 적용범위의 실질성, 지역 간 격차의 해소가 동시에 추구될 때 비로소 생활임금은 '준 최저임금'의 굴레를 벗고 노동정책의 당당한 한 축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그 출발점은, 생활임금을 행정 단가가 아니라 노동자의 삶을 기준으로 한 노동자의 실질적 참여를 기반으로 한 사회적 결정으로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이 글은 이창근(2026) "보편화된 제도, 정체된 내실: 2018~2026년 전국 지방자치단체 생활임금제도 실태 분석"(민주노동연구원 워킹페이퍼 2026-04)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상세한 수치와 분석 내용은 민주노동연구원 홈페이지(kctuli.kctu.org)에 게시된 해당 보고서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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