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기성의 인문기행 ] ③ 너브내 한내 웅천이 흐르는 진충보국 만세보령

[<사람과 산> 박기성 전문기자] 충청수영성에 도착하자 오후 다섯 시 반, 해넘참이 되어가고 있다. 북문으로 들어 영보정(永保亭) 아래 빈 공간에 얼른 차를 세우고 정자등(嶝)으로 뛰어 올라간다. 2015년에 복원한 정면 여섯 칸, 측면 네 칸의 누정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장엄의 여운은 성벽을 따라 서문으로 내려가는 길에도, 둔덕에 가려 아랫부분이 보이지 않아도, 나무 줄기들이 정자를 케익칼 자국처럼 나누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이 "세상의 호수·바위·정자·누각의 뛰어난 경치를 논하는 자 필히 영보정을 으뜸으로 삼는다" 했다는 풍설(風說)이 허랑(虛浪)하게 들리지 않는다.
진휼청(賑恤廳) 앞마당을 무질러 비석거리 끝의 삼문(三門)으로 간다. '바다를 당기다'는 뜻의 공해관(控海館) 현판을 달고 있는데 동헌 명찰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 같다. 삼문 위의 집 안내판에는 또 "객사 건물인 운주헌(運籌軒)이나 <오천군지>에 장교청이라고 잘못 기재되면서 혼동되어" 장교청(將校廳)이라 불린다고 되어있다.
객사라면서 날개집도 아닌 데다 정면 네 칸 중 동쪽 한 칸만 방으로 꾸민 구조도 뜨악하다. 어쨌거나 다시 동문쪽으로 가 시 계방향으로 성돌이를 시작한다. 이가경씨도 나도 여기는 여러 번 왔지만 성을 완전히 돌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두부모처럼 반듯하게 쌓은 복원 부분이 끝나자 허물어진 성터가 손 타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내탁식(內托式)으로 축조한 듯 바깥 이 가파르고 안쪽은 완만하다. 내환도(內環道) 옆의 무성한 시누대 밭을 보니 뱃속이 든든해진다. 적어도 개인화기의 '총알', 화살은 충분히 비축되어 있는 것 같아서다.
남문지(南門址)는 지금까지 밟고 왔던 성 동벽이 평지까지 내려간 지점에 있다. 현재도 발굴 중이라 안내판 사진만 찍고 팽팽히 서 벽으로 올라간다. 흔히들 이 성을 U자형이라고 하는 것은 양쪽이 높고 가운데가 낮은 단면 때문인 듯하다. 여기다 지형이 자라 형국이어서 '자라 오(鰲)'자 오천성이라고 했다나?
서벽이 직각으로 꺾이는 부분에 이르러 굽어보는 성안 풍경이 참 아늑하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의 영보정과, 얼마큼 떨어진 동헌 뒤로 호수 같은 내륙바다가 펼쳐져 있는데… 오천초등학교 앞의 외삼문으로 들어, 좌우의 관덕루(觀德樓)와 비장청(裨將廳), 새벽 인경 울리는 종각과 그 뒤편 내삼문 지나, 임금님 전패(殿牌) 모신 운주헌을 국립부여박물관의 '계획도시 사비 상상도'처럼 연필화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AI에게 '보령의 국가유산'을 물어보면 "성주사지를 중심으로 국보 1점과 보물 4점이 있다"고 한다. 이것 말고는 사적이나 천연기념물뿐이다. 이렇게 소중한 사적 307호 성주사지를 성주산 자연 휴양림에서 잔 다음날 찾아간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2만 평 빈 터를 왼쪽에 두고 박석(薄石) 진입로로 걸어간다. 이윽고 길이 꺾이는 데까지 가 몸을 돌려 중문지, 석등, 오층석탑, 금당지, 세 삼층석탑, 강당지 축선에 선다.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맨 처음 만나는 석등은 일제시대, 5층석탑 발치에 흩어져 있던 것을 대충 맞춰놓은 것이라는데도 단아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 장식이 없는 8각 간주석(竿柱石) 위아래 앙련(仰蓮)과 복련(覆蓮)의 매끄러운 꽃잎도 그러려니와 무미한 느낌의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 蓋石) 역시 뒤에 있는 보물 19호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소맷돌 사자상을 도난당해 모조품을 세워놓았다는 5층 계단을 올라 금당지 가운데의 부처님 대좌(臺座)를 본다. 태산이 무너져도 움직이지 않을 듯한 4매의 화강암이 짝을 맞춰 있는데 그 위의 부처님은 어디로 갔나 싶다.
바로 뒤의 석탑 삼형제는 13세기 후반에 중창할 때 외부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서쪽부터 보물 47호, 20호, 2021호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있다가 승격된 시기가 다르기 때문인데 이렇게 셋을 나란히 배치한 유례가 없어 궁금하고 신비로울 따름이다.
네 보물을 차례차례 지나 이윽고 국보에 다다른다. 낭혜화상 무염을 기린 국보 8호 대낭혜화상탑비다. 폭 155cm, 높이 263cm, 두께 43cm의 오석으로 되었는바 1138년이 지났는데도 5120여 자가 깨진 글자 하나 없다. 조선시대에도 전기에는 돌이 단단해 빗돌로 쓰지 못한 오석인데… 이 사실 하나로도 국보의 가치는 충분히 있다 할 것이다.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이었던 무염(800~888)은 열두 살에 승려가 되어 스물둘에 당나라 유학을 갔다. 마곡사 보철의 법맥을 이었으니 육조 혜능-남악 회양-마조 도일-마곡 보철로 내려오던 남종선(南宗禪)의 전법제자(傳法弟子)였다. 그래서 "훗날 중국 땅 선이 쇠미하게 되면 동이에게 가 물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845년에 귀국, 성주산문을 열었으며 40년을 주석하였다.
그가 성주사에 터를 잡은 것은 여기 보령이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김양(金陽)의 근거지여서였다. 양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때 김흔(金昕)이 적극 거들었던 듯 김양 열전에 그의 행적이 나온다. 양의 종부형(從父兄) 흔은 무염이 당나라 유학길을 떠날 때 같은 배를 타고 입조(入朝), 숙위(宿衛)했으며 귀국 후 대장군까지 올랐고 희강왕을 옹립했던 자다.
성주사지는 동서남북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네 산 모두 개성이 뚜렷하여 동쪽 만수산(575.4 m)은 오봉산, 절 뒤를 받쳐주는 서쪽 산(약 520m)은 오누이봉, 남쪽의 옥마산(596.9 m)과 북쪽 성주산(680.3 m) 서릉은 삼봉산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높이지만 동서 10리, 남북 시오리를 물러나 앉아 넉넉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만들고 있다. 하여 1000개의 연꽃잎, 1000개의 세계, 1000분의 부처님을 안치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세웠다는 저 삼천불전 터에.
글.사진 박기성 전문기자 l 사)한국山書會 회장이다. 서울大 문리대OB산악회장으로 〈사람과 산〉 편집장을 지냈다. 저서로 「삼국사기의 산을 가다」, 「명산」, 「울릉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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