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연 '찬밥'의 전성시대… 전력기기, 반도체보다 '핫'해졌다

김경준 2026. 5. 2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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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후장대 르네상스]
HD현대일렉트릭 울산 스마트 공장
생산성 20% 올리고 100% 풀가동
"AI 시대 맞아 몇 단계는 성장한 듯"
발전설비 부족에 선박 엔진까지 동원
유럽 공략 위한 친환경 기술 확보 관건
이달 14일 울산 HD현대일렉트릭 500kV 변압기 공장에서 직원들이 대형 부품을 조립하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 제공
"2022년 연말에 챗GPT가 나오기 전까지 공장 가동률이 82.3%였는데, 작년 3분기부터는 100% 풀가동 중입니다."

14일 울산 HD현대일렉트릭 500킬로볼트(kV) 변압기 공장은 거대한 부품들을 조립하느라 분주했다. 박상욱 변압기생산부 부서장은 잠시 고개를 돌려 최근 몇 년 새 달라진 현장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외부 손님 안내를 맡고 있는 이규동 책임은 "요즘 고객사 등에서 공장 방문 요청이 빗발치고 있다"고 말했다.

총조립장에는 한 대가 수출입 컨테이너와 맞먹는 크기의 변압기 12대가 들어차 있었는데, 이날 아침에도 몇 대가 출고됐다. 박 부서장은 "여기 생산분은 모두 수출인데, 대부분 교체가 아닌 신규 물량"이라며 "사이클 산업(주기적으로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산업)이었던 전력기기가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몇 단계는 단번에 성장한 것 같다"고 말했다.


4년 새 영업익 100배… 변압기 주가 상승, 반도체·방산 압도

14일 울산 HD현대일렉트릭 500kV 변압기 공장에서 세계 최초로 도입한 철심자동적층설비가 철심에 쓰이는 0.2㎜ 두께의 규소 강판을 설계에 맞춰 쌓아 올리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 제공

AI 시대 도래 전 '찬밥' 취급을 받았던 중후장대(무겁고 두껍고 넓고 큰) 산업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다. 2017년 이전까지 HD현대중공업의 사업본부에 불과했던 HD현대일렉트릭은 영업이익 1조 원을 눈앞에 뒀다. '중후장대 르네상스'라 할 만하다.

AI의 후광을 제대로 받은 업종들은 모두 '전력'이나 '데이터센터'와 관련이 있다. 생성형 AI 검색은 전력 소모량이 일반 검색의 약 10배라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린다. 데이터센터 역시 전력 공급은 필수 요건이다. 이에 발전, 송·배전, 해상 부유식 데이터센터 등 AI의 뼈대가 되는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전통 산업들이 다시 한번 달아올랐다.

전력기기의 상승세는 '부활'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당장 변압기가 없어 데이터센터를 짓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히타치, 지멘스, 제너럴일렉트릭(GE) 등 글로벌 강자들 틈에서 K전력기기가 점유율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특히 납기를 단축하는 속도전과 까다로운 규격을 준수하는 정밀성에서 K전력기기의 강점이 두드러진다. 미국에 공장을 짓고 시장을 선점한 것 역시 주효했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성장세는 주가만 봐도 확연하다. 변압기를 생산하는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의 주가는 2020년 3월 말 저점 대비 각각 약 2만3,400%, 4만6,000% 상승했다. K반도체의 쌍두마차 삼성전자(600%)와 SK하이닉스(2,800%), K방산 3대장 한화에어로스페이스(8,400%) 현대로템(2,200%), LIG디펜스앤에어로스페이스(5,600%)의 상승률을 압도한다.

영업이익률도 두 자릿수다. 특히 HD현대일렉트릭은 올해 1분기 24.9%라는 전통 제조업에서 보기 힘든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판매 단가 상승과 고부가가치 제품 선별 수주 전략에 2020년 완공한 500kV 스마트 팩토리를 통해 생산성을 20% 높이고, 불량률을 90%까지 줄인 덕이다. HD현대일렉트릭 영업이익은 2021년 97억 원에서 지난해 9,953억 원으로 4년 새 100배 이상 늘었다.


장거리 송전 증가… 전선업계도 '역대 최고'

LS일렉트릭 청주사업장에서 직원들이 배전반을 최종 점검하고 있다. LS일렉트릭 제공

최근의 성장세는 상당 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HD현대일렉트릭과 효성중공업에 배전기기가 주력인 LS일렉트릭까지 더한 전력기기 3사의 올해 1분기 수주 잔고는 약 32조3,500억 원이다. 최소 4, 5년 치 일감이 확보됐다.

늘어나는 북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투자도 이어졌다. HD현대일렉트릭은 올해 3월 약 3,000억 원을 투자해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북미법인 부지에 제2공장을 착공했다. 효성중공업은 2020년 인수한 테네시주 멤피스 공장에 2,300억 원을 들여 2028년까지 초고압 변압기 생산 능력 50% 이상 확대를 목표로 추가 증설을 진행 중이다. LS일렉트릭도 유타주를 중심으로 북미 전역 생산 거점에 총 3,500억 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전력 소모량 증가세는 더 가팔라질 전망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0년까지 AI 전용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3배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고, 골드만삭스는 최근 2030년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전망치를 작년보다 45%포인트 높여 잡았다. 미국 빅테크들이 조 단위 현금을 데이터센터 건설에 쏟아붓고 있는 것도 이런 예상을 뒷받침한다.

전선업계도 덩달아 호황이다. LS전선은 올해 1분기에 전년 대비 16.9% 많은 1,971억 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대한전선, 가온전선, 일진전기 등 전선 업체들 모두 1분기 기준 역대 최고 실적을 갈아치웠다. 변압기 공급이 늘면 이를 연결할 전선 수요가 뒤따르게 되고, 데이터센터는 일반 사무용 빌딩보다 훨씬 굵고 많은 양의 전선을 필요로 한다.


선박 엔진까지 발전용으로… FDC 신시장 열려

HD현대중공업의 육상 발전용 힘센엔진(HiMSEN). HD현대중공업 제공

AI 훈풍은 발전 분야에도 불고 있다. 글로벌 대형 가스터빈 시장의 후발주자인 두산에너빌리티는 2019년 첫 실증 공급 이후 7년 만에 23기를 수주하는 성과를 냈다.

가스터빈 역시 변압기처럼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빅3인 GE, 지멘스, 미쓰비시가 글로벌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데, 수요가 급증하자 두산에너빌리티에 기회가 찾아왔다. 빅3 업체가 몰려드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하니 발전설비 확보가 급해진 빅테크들이 두산에너빌리티를 대안으로 찾은 것. 지난해 하반기에는 가스터빈의 본고장인 미국에 가스터빈 5기 공급계약도 맺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2034년까지 누적 105기 수주를 목표로 잡았다.

발전설비 부족은 조선업계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난달 HD현대중공업은 미국 에이페리온 에너지 그룹(AEG)과 6,271억 원 규모의 발전설비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에서 가스터빈 대신 즉시 인도가 가능하고 검증된 대안인 한국의 선박용 엔진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선박 엔진은 가스터빈보다 초기 비용과 연료비도 적게 든다. 증권가에서도 HD현대중공업의 데이터센터용 엔진 수주가 증가할 것이라며 앞다퉈 목표주가를 올리고 있다. 한화엔진 역시 데이터센터용 발전 엔진 생산을 위해 라이선스 재협상과 생산설비 증설을 진행 중이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해상 부유식 데이터센터(FDC)도 AI가 물고 온 조선업계의 새 먹거리다. FDC는 육상 데이터센터의 막대한 냉각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부지 문제도 해결할 수 있어 주목받는다. K조선 3사는 2034년까지 연평균 1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는 FDC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지난달 미국 '데이터센터 월드 2026'에서 자체 개발한 FDC 콘셉트를 공개하고, 미국 업체들과 기술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는 등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AI 특수로 장밋빛 전망이 빗발쳐도 글로벌 선도 기업과의 기술 격차 등은 해결 과제다. 특히 미국에 이어 개화할 유럽 시장 공략에는 친환경 기술 확보가 급선무다. 업계 관계자는 "유럽 시장을 개척하지 못한다면 10년 안팎으로 예상되는 미국발 호황이 끝나는 시점에 급격한 '피크 아웃(하락 전환)'이 올 수도 있다"며 "환경 규제가 엄격한 유럽 시장에 대응하려면 친환경 기술을 고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울산=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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