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속 뜯지 못한 컵라면에 이끌려…'구의역 김군'의 자리로 출근한 남자의 10년 [Story]
서른 넷에 접한 승강장 사고 소식
주위 만류에도 김군 일터로 출근
쉴 틈 없이 출동, 첫 월급 130만원
더 이상 가방 속 컵라면은 없지만
안전문제 비용 인식, 불안감 여전
편집자주
한국일보 'Story'는 곱씹을 만한 이야기를 내러티브 방식으로 풀어나가면서 삶에 대해 음미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2016년 5월 28일 오후 5시 57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9-4번 승강장에서 10대 청년의 시간이 멈췄다. 열아홉 번째 생일을 겨우 하루 앞둔 날이었다. 홀로 지하철역 스크린도어를 고치던 그는 달려오는 열차를 끝내 피하지 못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청년의 가방 속에는 정비 공구들과 함께 뜯지 않은 컵라면 한 개와 숟가락, 나무젓가락이 들어 있었다. 그는 떠났지만, 처음부터 죽음은 없었던 것처럼 20여 분 만에 수습됐고,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열차는 신속히 운행을 재개했다.
그날 서른네 살의 임선재씨는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구직 활동에 한창이던 임씨는 다음 날이 돼서야 사고 소식을 접했다. '구의역 승강장에서 사고가 발생해 열차 운행이 지연됐다'는 단신 기사가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후속 기사들을 보게 되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숨진 청년의 가방 속에서 나온 '뜯지 못한 컵라면'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제때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승강장 사이를 뛰어다녔을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업 중 일어난 한 청년의 죽음은 믿기 힘들 정도로 허망했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임씨는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듯 구의역 9-4번 승강장으로 향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 행로를 바꿀 첫걸음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무렵 세상은 승강장에서 스러진 그 청년을 '구의역 김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들 억울함 풀어달라던 어머니의 호소

사고 다음 날 찾은 구의역 9-4번 승강장 벽면은 시민들이 붙인 추모 포스트잇으로 빼곡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저녁마다 구의역에서 병원 장례식장까지 묵직한 침묵의 행렬이 이어졌다. 퇴근길 직장인들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 김군 또래로 보이는 청년들이 촛불과 하얀 국화꽃을 손에 들고 말없이 줄 지어 걸었다.
사고 직후 원청업체였던 서울메트로(현재 서울교통공사)는 매뉴얼을 준수하지 않았다며 김군에게 책임을 돌리는 데 급급했다. 김군이 소속돼 있던 외주업체 은성PSD도 김군의 부주의를 탓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어느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구의역을 찾는 시민들의 행렬은 계속 커져만 갔다.
임씨도 보름간 슬픈 행진에 함께했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추모객들을 맞이한 김군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내 아들이 잘못해서 죽은 게 아니라는 걸 밝혀달라고 했다. 혼자서 위험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고 다시는 아들과 같은 죽음이 없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김군 어머니의 애끓는 목소리가 임씨의 가슴을 후벼팠다. 눈물로 얼룩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임씨는 무엇이 김군을 지키지 못했는지 생각했다. 그저 슬퍼하고 넘어간다면 비극이 되풀이될 거라는 두려움도 생겼다.
구의역 사고 이후 몇 달 뒤 지하철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직원을 서울메트로가 직접 채용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무기계약직 자리였지만, 업무는 김군이 외주업체에서 했던 것과 똑같았다. 주위에서는 사고 잔상이 가시지 않은 위험한 업무라며 지원을 만류했다.
하지만 임씨의 눈앞에는 구의역 벽면에 붙어있던 추모 포스트잇과 김군 어머니의 눈물이 떠올랐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김군이 떠난 그곳에서 지독하게 외로웠을 그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렇게 임씨는 그해 9월 김군처럼 지하철 승강장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소속은 달라도 스크린도어 유지보수 업무를 맡은 '김군의 후배'가 된 셈이었다.
열악한 환경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다

임씨가 처음 마주한 업무 현장은 생각보다 훨씬 고단했다. 스크린도어 고장 신고가 밀려들 때면 쉴 틈 없이 출동해야 했다. 컵라면을 가방에 넣고 다녀야 했을 김군의 상황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인력은 늘 부족했다. 동료들은 늘 김군의 죽음에 대해 미안함과 트라우마를 동시에 안고 살아갔다. 사고 전날 김군과 근무를 교대하며 "내일 너 생일인데 밥이나 같이 먹자"고 인사했던 동료는 한동안 김군의 죽음을 쉬이 인정하지 않았다. 생일을 축하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점이 너무 후회됐다.
그럼에도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임씨의 첫 월급명세서에 찍힌 숫자는 130만 원 남짓. 지하철역을 바쁘게 오가며 일한 대가치고는 초라했다. 김군의 사고 이후 스크린도어 담당 직원들의 처우와 업무 환경이 개선됐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현장은 여전히 열악했다. 직원들은 고개를 저으며 분노했다. 같이 일하던 선배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 아들보다 월급이 적다"고 하소연했다.
임씨는 2017년부터 동료들의 손을 잡고 차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스크린도어 업무 현장의 어려움을 알리고 정규직 전환과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외쳤다. 김군과 같이 일했던 동료는 시위를 할 때마다 두 개의 피켓을 들었다. 피켓 하나는 자신의 것, 다른 하나는 김군의 몫이었다. 그들은 김군이 생전에 이루지 못한 정규직 전환을 대신 촉구했다. 김군이 세상을 등지게 만든 스크린도어 현장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그렇게 임씨와 동료들은 2018년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그날 임씨는 기관사를 꿈꿨던 김군 생각이 유독 많이 났다.
'위험 거부할 권리' 생겨도…부채감은 여전

김군이 떠난 지 10년. 현장은 제법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제는 아무리 스크린도어 고장 신고가 빗발쳐도 절대로 혼자서 선로에 몸을 내밀 일은 없다. 2인 1조 작업은 아직 법으로 의무화되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선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위험한 업무를 거부할 권리도 생겼다. 장비 개선으로 작업 환경도 훨씬 안전해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지보수 작업은 열차 운행 종료 후 수행하는 것이 기본이 됐다. 불가피하게 운행 중 작업에 나설 때도 2중, 3중의 승인 절차를 밟아 극히 제한된 시간에만 투입된다. 이제 동료들의 가방 속에는 컵라면이 없다. 김군이 겪었던 비극은 다시 일어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임씨는 아직도 김군 어머니의 외침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지하철역사는 넓지만 관리 인력은 늘 부족하다. 안전 문제를 비용과 효율로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탓이다. 언제든 또다시 김군과 같은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지금도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는 산업재해가 끊이지 않는다. '1년 365일 장례식장이 아닌 곳이 없다'는 말처럼 누군가의 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임씨는 10년 전 구의역으로 돌아간 듯 가슴이 턱 막힌다.
올해도 김군의 생일을 기억하려 합니다

어느새 마흔을 훌쩍 넘긴 임씨는 20대와 30대 후배 직원들을 볼 때마다 흐뭇하면서도 동시에 미안함을 느낀다.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멈춰 서버린 열아홉 살의 김군이 떠오른다.
활짝 웃고 있는 후배들의 얼굴 위로 직접 만나보지도 못한 김군의 실루엣이 겹친다. "직원들과 만날 때마다 늘 김군 생각이 나요. 살아 있었다면 딱 저 나이겠구나, 저 틈에서 같이 이야기하며 꿈을 키우고 있었을 텐데. 김군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좀 더 안전해진 세상에서 마음껏 자신의 인생을 펼쳐보라고 응원해주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매년 5월이면 구의역 승강장에는 김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스스로를 김군의 후배라고 소개하는 임씨는 10년 전 김군과 함께 일한 동료들과 그를 떠올린다. 또래들 사이에서는 환하게 웃다가도 선배들 앞에만 서면 유난히 말수가 적었던 김군. 누군가에게는 착한 동생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친구였던 김군. 임씨는 올해도 김군의 스물아홉 번째 생일을 기억하며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이다. 5월 28일, 세상 사람들도 한번쯤 기억해줬으면 하는 날이다.
이용경 기자 yk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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