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엄마役 했지만… 48년 연기 중 가장 파격적인 엄마”

“이름 대신 ‘누구 엄마’로 불리며 평생 자기 이름을 갖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엄마들 이야기예요. 표현할 줄 모르고, 그저 참는 게 미덕인 줄 알았던 엄마의 모습, 가족이 다 함께 한번 생각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최근 서울 마포의 작은 연극 연습실에서 만났을 때, 드라마 속 화려한 모습으로 익숙했던 배우 정애리(66)가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29일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해 내달 7일까지 단 11회 공연하는 연극 ‘더 마더’에서 주인공 ‘안느’ 역을 맡았다. 그는 작품에 대해 “결국 여자가 잊고 있던, 혹은 잃어버렸던 이름을 되찾는 이야기”라고 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배우로서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중년을 넘어선 여자 배우로서 욕심을 내볼 만한 작품이라 생각했습니다.”
◇ 몰리에르·토니상 등 휩쓴 佛 원작
‘더 마더’는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프랑스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의 가족 3부작 중 한 편이자 그 시작. 젤레르는 몰리에르상, 올리비에상, 토니상 등 프랑스, 영국,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상을 휩쓸었고, 직접 각색·감독한 영화 ‘더 파더’로 영·미 아카데미 각색상과 남우주연상(앤서니 홉킨스)을 받았다.

국내에선 2024년 전무송 배우가 치매로 쇠약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존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아버지로 출연한 ‘더 파더’가 호평을 받았다. 당시 ‘더 파더’를 만든 극단 ‘스튜디오 반’ 대표 이강선 연출가가 이번엔 ‘더 마더’를 무대에 올린다. 2016년 국립극단이 박근형 주연의 ‘아버지’와 고(故) 윤소정 주연의 ‘어머니’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서 하루씩 번갈아 공연하는 방식으로 함께 올리기도 했다. 2020년 대학로에서 연극열전이 제작한 ‘아들’(연출 민새롬)도 공연됐다.
연극 속 여자 ‘안느’는 가족을 자신의 삶의 유일한 의미이자 전부로 삼고 살아온 인물. 하지만 아들이 애인이 생겨 독립하고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해지면서 삶의 무게 중심을 잃어버린 채 광기에 가까운 우울에 젖어든다. 연극은 마치 현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를 헤매는 안느의 1인칭 심리 스릴러처럼 느껴진다.
◇ “연기 인생 48년, 전에 없던 도전”

1978년 만 열아홉에 TV 탤런트로 화려하게 데뷔해 연기 경력만 48년. 하지만 정애리는 “평생 대사 외우는 걸 어려워해 본 적이 없는데, 이번 연극은 유독 긴장된다”며 웃었다. “반복되는 대사가 극의 흐름을 따라 조금씩 비틀려 다른 뉘앙스로 등장해요. 토씨 하나를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튈 수 있어서 여전히 긴장됩니다.” 그는 “많이 연습하면 저절로 외워지는 극도 있는데, 이 작품은 생활 대사인데도 법률·의학 용어 외우듯 외워야 해서 새로운 도전이 된다”고도 했다.
TV 속 그는 자애로운 어머니, 냉철한 여성 기업인, 표독스러운 시어머니 같은 여성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 이번 연극은 그에게 “드라마에서 정애리가 여러 각도에서 보여줬던 얼굴을 무대 위에서 한꺼번에 보여줄 기회”이기도 하다.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모든 걸 다 바쳐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이 부정당한 여자, 자신의 의심일 뿐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눈앞의 현실…. 그런 혼돈이 이 작품의 매력이에요. 극의 마지막에 안느가 ‘그게 다 뭘 위해서야?’ 하고 반문할 때, 제겐 그 질문이 오히려 새로운 출발처럼 느껴지더군요.” 이번 연극도 어쩌면 정애리의 새로운 출발이다.
◇ “알고 보면 저도 연극 데뷔 43년차”



뮤지컬 ‘친정 엄마’ 이후 10년 만의 무대. 정애리의 이름 앞에 ‘연극 배우’라는 호칭은 아무래도 낯설지만, 실은 뜻밖에 연극 경력이 오래됐다. “데뷔 뒤 몇 해 안 돼 1983년 연출가 고(故) 이진순 선생의 극단 광장이 올린 체호프 연극 ‘갈매기’에서 주인공 ‘니나’로 출연했어요. 1987년엔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마차’로 서울연극제에서 최우수 여자 연기상을 받았고요.”
이진순 연출은 이해랑·김동원 선생과 일본 유학 시절 ‘동경학생예술좌’를 결성해 우리 신극 운동을 주도한 연출가. 체호프의 4대 장막 희곡 중에서도 ‘갈매기’는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의 좌절에 관한 이야기라 연극 배우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고, 여주인공 ‘니나’는 여배우들에겐 꿈의 배역이다.
“당시 백상예술상 영화 심사위원을 맡으셨다가 제 출연작을 보시곤 ‘정애리 데려오라우, 같이 연극 해보갔서’ 하셨다고 들었어요, 하하.” 정애리는 당시 최고의 극장이던 문예회관 대극장(현 아르코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마이크도 없어 온전히 배우의 발성만으로 대극장 객석 끝까지 대사를 전달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이진순 선생님이 제가 연기할 때 극장 구석 구석을 다니시며 “아주 좋아, 아주 잘 들려”하며 흡족해 하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무대 초짜’ 신인을 따뜻하게 격려해주신 어른이셨습니다.” 이후 정애리는 1994년 2월 이진순 연출 10주기를 추모하며 열린 ‘갈매기’ 공연에도 참여했다.
극단은 이 연극을 “정애리 배우 연기 인생 48년, 가장 파격적 균열”이라고 했다. “좋은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었어요. 그 모든 날이 다 합해지고 그 모든 연기가 다 더해져서 지금의 제가 되었지요. 그렇게 조금 더 단단해진 무대 위 배우 정애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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