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살 은행나무에 제초제 주입…“환기미술관, 책임지고 복구해야”

김양진 기자 2026. 5. 2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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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환경연합 “은행나무 독살 시도”
환기미술관에 사과·복구 요구
2026년 5월23일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 옆에서 주민들이, 환기미술관 측에 의해 제초제가 주입된 은행나무의 회복을 기원하고 환기미술관의 사과를 요구하는 행사를 열었다. 서울환경연합 제공

서울 종로구 부암동 환기미술관 옆 오래된 은행나무에 제초제가 주입된 사건과 관련해, 서울환경연합은 “환기미술관은 주민에게 사과하고 책임 있게 복구하라”고 25일 요구했다. 앞서 23일 한겨레는 환기미술관이 이 은행나무에 제초제를 주입한 사실이 확인됐고, 최근까지 건강했던 나무에서 푸른 잎이 대량으로 떨어지는 등 급격한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제초제 맞은 200년 은행나무

서울환경연합은 이날 성명을 내어 “환기미술관이 담벼락 밖 200년 은행나무에 수십 일간 제초제를 주사한 정황이 밝혀졌다”며 “은행나무를 고사 직전에 이르게 한 잘못을 시인하고 깊은 상처를 입은 마을 주민에게 사과하며 최선을 다해 회복과 돌봄에 나서야 한다”고 밝혔다. 이 단체는 성명에서 “나무가 푸른 잎을 급격히 떨구고 남은 잎은 누렇게 마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부암동 주민들이 뿌리 부근 앞뒤에서 드릴로 뚫은 구멍과 수간주사 캡 여럿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어 “제초제 주입 등 고의적 훼손 가능성을 의심한 주민과 경찰은 인근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통해 누군가 나무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제초제를 넣는 모습을 확인했다”고 했다.
21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ㅎ미술관 옆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 도로가 떨어진 잎으로 뒤덮여 있다. 주민들은 해당 미술관 쪽에서 이 나무에 제초제 주입한 뒤 잎이 대량으로 떨어지는 등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주민 제공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해당 은행나무는 환기미술관 외벽 인근 공동사유지에 있는 나무다. 환기미술관 소유는 아니며, 여러 명이 공동소유한 도로에 자리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 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지는 않지만 100년 이상, 길게는 200년 가까이 부암동 골목을 지켜온 오래된 은행나무라고 보고 있다. 주민들이 보내온 사진을 보면, 한창 잎이 무성해야 할 5월 하순인데도 은행나무 아래 도로는 떨어진 잎으로 뒤덮여 있었고, 수관 곳곳의 잎은 누렇게 변하거나 말라붙은 모습이었다.

주민들은 5월22일 경찰과 함께 인근 CCTV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환기미술관이 고용한 조경업체 직원들이 나무 앞에 쪼그려 앉아 드릴로 구멍을 뚫고 약제를 주입하는 장면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이후 경찰과 함께 환기미술관 관계자를 만나 지난달 나무 뿌리 인근에 여러 개의 구멍을 뚫고 제초제를 주입한 사실을 인정받았다.

환기미술관 쪽은 앞서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나무 뿌리로 담벼락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수년 전부터 나무 뿌리가 담벼락 밑으로 파고들어 담벼락에 금이 가는 등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했고, 나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청 및 토지 소유주들과 접촉했으며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환경연합과 주민들은 종로구청이 안전진단을 한 결과 위험성이 인정되지 않아 나무를 제거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서울환경연합은 “미술관 쪽은 은행나무에 제초제를 주사한 이유를 아직까지 밝히지 않았으나, 과거 미술관이 ‘은행나무가 커져서 외벽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 민원을 종로구청에 제기했다고 전해졌다”며 “구청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구청이 안전진단을 실시했으나 위험하지 않다고 평가돼 나무를 제거하지 않았던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서울환경연합은 이번 사건에서 사유지 나무를 둘러싼 제도적 결함도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은행나무가 있는 곳은 미술관과 주택 사이에 난 길로, 소유자가 40명 이상인 공유토지다. 서울환경연합은 “은행나무의 위급한 상태를 확인한 주민이 당장 조치를 취하기 위해 구청 녹지과에 문의했지만 ‘사유지 나무라 관여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며 “현재 법제도는 도시 나무를 생명권의 주체가 아니라 사유재산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소유주가 불분명한 나무는 스스로 보호할 수 없고, 권리가 침해된다면 구제받기 어렵다”고 밝혔다.

나무 상태도 위중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환경연합은 한 나무의사의 진단을 인용해 “은행나무는 제초제에 제일 취약한 종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마른다”며 “충분한 수분을 공급하고 증발을 최소화하며, 뿌리가 숨 쉴 수 있도록 나무 주변 아스팔트를 즉시 제거해야 한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환기미술관과 종로구에 △제초제를 마신 은행나무를 살려낼 것 △환기미술관이 공식 사과하고 나무를 살리는 비용을 부담할 것 △이 나무를 종로구 보호수로 지정해 보존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김환기의 ‘자연’ 곁에서 벌어진 일

이번 사건은 환기미술관이 기리는 화가 김환기(1913~1974)의 예술세계와도 대비된다.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달과 산, 구름, 새, 매화, 백자 항아리 등 한국의 자연과 전통을 주요한 조형적 원천으로 삼았다. 환기미술관도 김환기의 예술세계에서 자연이 중요한 화두였다고 설명해왔다. 환기미술관은 “김환기가 전 생애를 관통해 사유하던 예술세계의 화두는 자연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환기미술관은 1992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문을 연 사립미술관으로, 김환기 사후 부인 김향안이 세운 환기재단을 바탕으로 운영돼왔다.

자연을 예술의 근원으로 삼았던 작가를 기리는 미술관 곁에서 오래된 은행나무가 제초제 피해로 고사 위기에 놓였다는 점에서, 주민들의 충격은 더 크다. 서울환경연합은 “환기미술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사건을 주목하고 있다”며 “환기미술관은 은행나무를 고사 직전에 이르게 한 잘못을 시인하고, 깊은 상처를 입은 마을 주민에게 사과하며 최선을 다해 회복과 돌봄에 나서라”고 밝혔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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