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세 이후 다시 전성기… ‘인연’ 수필가 피천득

이한수 기자 2026. 5. 25.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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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2007년 5월 25일 97세
피천득 선생

수필가 피천득(1910~2007)은 아흔일곱 번째 생일 나흘을 앞둔 2007년 5월 25일 별세했다. 구순 이후가 오히려 전성기였다. 신문에 인터뷰·대담 기사가 거의 매년 실렸다.

90세 때인 2000년은 두 차례였다. ‘“이젠 떠날 준비를 해야 하겠네” / 피천득 선생 구순 파티’(2000년 5월 12일 자 25면), ‘“잊혀지는 걸 두려워말고 자잘한 일상 소중히 해야”/ 피천득·김태길 선생 ‘인생과 수필’ 정담’(2000년 9월 4일 자 21면). 2002년 3건, 2003년 2건, 2005년 2건이었다.

2000년 5월 12일자 25면.

별세 1년 전인 2006년에는 3건이 실렸다. ‘수필가 피천득·출판원로 정진숙 합계 190세 추억의 정담’(2006년 2월 23일 자 A21면), ‘수필가 피천득 “사랑하다가 떠났구나 하고 한숨 지어주길”’(2006년 7월 26일 자 A27면), ‘피천득 수필집 32년만에 일어로 출간 “살아있다면 84세, 아사코도 알겠지요”’(2006년 9월 8일 자 A31면).

피천득은 시인 이상과 동갑이다. 같은 해인 1910년 태어나자마자 나라가 없어졌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데 이어 열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수필 ‘엄마’에서 애틋한 그리움을 토로한다.

2005년 5월 21일자 A8면.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 잃어버려 그의 사랑 속에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다.”

중국 상해 호강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45년 경성대(서울대 전신) 예과 교수를 시작으로 1975년까지 서울대 사범대 교수를 지냈다.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 무해하고 청정한 수필로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로 시작하는 ‘수필’, 일본인 소녀 아사코와의 추억을 담아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고 회고한 ‘인연’은 교과서에도 실렸다.

2008년 6월 9일자 A18면.

막내딸 ‘서영이’를 주제로 쓴 글도 잘 알려져 있다. 1946년생인 딸 피서영씨는 훗날 미 보스턴대 물리학 교수가 된다. 서영의 아들로 피천득의 외손자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는 2008년 내한 공연했다. “네 살 무렵부터 10대가 될 때까지 여름마다 한국을 찾아서 여름방학 내내 할아버지와 함께 지냈다”면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영상이나 카라얀이 지휘하고 안네 소피 무터(바이올린)가 연주하는 비디오를 함께 보기도 했어요. 할아버지는 무터의 팬이었고 영화 ‘아마데우스’를 소개해주기도 하셨어요”(2008년 6월 9일 자 A18면)라고 했다.

1956년 8월 5일자 4면.

1956년 8월 5일 자 조선일보 부록 ‘소년조선일보’에는 아빠 피천득과 열 살 딸 서영이 주고받은 편지가 실려 있다. 피천득이 하버드대에서 1년간 연구할 때 보낸 편지와 딸의 답장이다.

“보고 싶은 서영이에게. 몸성히 학교에 잘 다니니? 편지가 아니 와서 아빠는 또 잠을 잘 못 잔다. 며칠 전에 받은 옥순이 아줌마 편지에 네가 학교 운동장에서 고무줄 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이 있어 매우 기뻤다. 네 웃니 빠진 것 두 개 새로 나왔니? 아빠는 네가 보고 싶을 때면 네가 부르던 노래를 불러본다. 아빠가 와 있는 곳은 미국 동북방 끝이다. 서울이 낮 정오이면 이곳은 그 전날 밤 열시 사십오분이 된다. 아침 여덟시 네가 학교에 갈 때는 여기는 저녁 여섯시 사십오분이다. 우리 매일 이때면 똑같이 서로 생각하자. (…)”

“보고 싶은 아빠에게. 어제밤 꿈에는 아빠가 서울에 돌아왔는데 나는 어찌나 기뻤는지 몰랐어. 내가 아빠 손도 만져보고 아빠가 나를 껴안아도 보고 했어. 아빠 편지에 내 앞니 빠진 것 대신 새 이가 나왔느냐 물었는데 그 이는 다 나고 또 아랫니를 둘 뽑았는데 그 이도 다 나고 어금니 뺀 것만 아직 안 났어. 아빠 살 많이 쪄서 한국에 와 가지고 나하고 누가 살 많이 쪘나 내기해 응. 내가 지금 적어 보내는 것을 책상 위에 붙여 놓고 잘 지켜. 1. 우리들 생각 너무 하지 말 일. 2. 천천히 음식을 먹고 천천히 걷고 천천히 책을 볼 일. 그리고 다음부터 편지 겉봉투에 오빠 이름만 쓰지 말고 내 이름도 써. 나는 일 년이 이렇게 긴 줄 몰랐어. 이렇게 긴 줄 알았으면 여행권을 감추어 버릴 걸.(…)”(1956년 8월 5일 자 석간 4면)

2007년 5월 26일자 A19면.

97세 생일인 2007년 5월 29일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영결식이 열렸다. 유족을 비롯해 김남조 시인,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이해인 수녀, 소설가 조정래씨 등 문인과 각계 인사 200여 명이 참석했다.

“이해인 수녀는 조시(弔詩) ‘피천득 프란치스코 선생님을 기리며’를 통해 “존재 자체로 시와 수필이 되신 선생님/…/ 선생님께 작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라고 추모했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조문객 대표 조사를 통해 “많은 문인이 때 묻고 추하게 변하는 현실에서 선생님은 항상 맑고 깨끗했다”고 말했다. 제자인 석경징 서울대 명예교수는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사셨지만 진주 같은 시집과 산호 같은 수필집을 남기셨다”는 말로 고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렸다.”(2007년 5월 30일 자 A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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