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는 '실패한 책공장'인가?… '파주 1세대'의 두 갈래 선택

최다원 2026. 5. 25.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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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출판단지 30년, 변화의 기로에 서다]
<상> 책향기 옅어지는 출판단지
"인프라 편리함보단 서울 미팅 이동 비효율 커"
20년 만에 파주살이 접고 서울로 사옥 재이전
열화당은 만족… 책박물관 열어 단지 활성화
"약점 부각하기보단 출판단지 정체성 살려야"
한국일보 자료사진

"출판단지 시범지구에 입주하는 우리에의 기대를 명심하겠습니다."

1998년 10월 일간지 문화면엔 파주출판문화정보국가산업단지(파주출판단지)로 이전을 확정한 53개사 명단이 실렸다. 1922년 육당 최남선이 설립한 동명사를 포함한 유수의 출판사들과 국내 최고(最古) 인쇄소인 보진재, 제지업체 등이 이름을 올렸다.

파주출판단지는 국내를 넘어 세계 출판계의 이목을 끄는 사업이었다. 서울 마포구와 중구 등에 산재해 있던 생산·유통기능을 한데 모아 출판 생태계를 구축하고 문화예술 메카로 만들자는, 국제적으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왼쪽엔 한강이 흐르고 오른쪽엔 심학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경기 파주시 부지의 독특한 지형은 국가산업단지를 생태도시로 설계하는 밑바탕이 됐다. 국내외 유명 건축가가 단지 조성에 합세했고, 일각에선 비무장지대(DMZ)와 가까워 향후 남북 문화교류의 중심지가 될 거란 기대감도 커졌다.

한 세대가 지난 2026년 현재, 신문 지면을 통해 출판도시의 창성을 결의했던 회사 중 60%가량만 파주에서 계속 영업하고 있다. 일부는 서울로 사옥을 옮겼거나 경영난 등으로 문을 닫았다. 2020년 429곳까지 늘었던 입주 출판사 수는 지난달 기준 293개사로 쪼그라들었다.

혹자는 파주출판단지를 '실패한 책 공장'이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곳에서 300곳 가까운 출판사가 책을 만들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출판사의 빈자리를 메우는 예술·디자인 업계의 진입도 눈에 띈다. 한국일보는 '파주 1세대' 출판사 두 곳을 통해 출판단지가 30년간 겪어온 변화와 새로운 도약 가능성을 따져봤다.


서울로 사옥 재이전한 A출판사

3월 19일 경기 파주출판문화단지 내 이채 쇼핑몰에 인적이 끊겨 있다. 정다빈 기자

"위치로 서울을 이길 순 없어요."

지난달 10일 만난 A출판사의 대표는 사옥 이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A출판사는 출판단지 1단계 준공(2004년) 초기 입주했으나 몇 해 전 파주살이 20년을 정리하고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서울 마포구로 옮겼다.

단지 조성 초기부터 지적받은 '접근성'의 한계를 극복하기가 어려웠다는 게 A사 대표의 설명이었다. 그는 "출판사 규모나 작업 성격별로 차이가 있다"고 전제하면서 "편집자가 서울에서 저자·서점·에이전시와 만나려면 반나절을 통으로 비워야 하는 비효율이 고민스러웠다"고 말했다. 출판 인프라 집적을 통한 효율성 향상이 단지 조성의 핵심 목표였던 점을 감안하면 기대는 빗나간 셈이다. 그는 "인쇄·제본소가 가까워 생기는 편리함도 분명히 있다"면서도 "감리는 한 달에 한두 번이지만 미팅은 수시로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근무 환경 역시 아쉬웠다. 1989년 9월 출판문화단지 건설조합 발기인대회는 "출판타운이 의료시설과 사원주택 등을 고루 갖추게 될 것"이라고 공언했으나, 국가산업단지 특성상 거주시설 건축은 불가했고 하나 있던 약국은 문을 닫았다. 우체국도 차를 타야 하는 거리에 있다. 상당수 직원들은 원거리 출퇴근을 감내해야 하지만, 서울을 오가는 통근버스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기간이 최근 만료돼 운행이 축소됐다. 주차장 공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2003년 4월 경기 파주출판문화단지 공사가 한창인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렇다 보니 파주출판단지는 구인에도 적잖은 애로를 겪고 있다. A출판사는 사옥을 서울로 이전하자 지원자 수가 2.5배 증가했다고 한다. "파주에 있을 땐 서울 서북부 거주자들이 주로 지원했는데 이젠 경기 남부권에서도 입사를 희망하더라고요."

건물 관리도 입주사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문제다. 분양 당시 최소 건축 면적이 660㎡였던 터라 중소·중견 출판사는 부담스러운 규모의 사옥을 갖게 된 것. 파주의 추운 날씨로 보일러 고장은 잦았고 2010년대 이후 출판산업 위축과 맞물려 공실은 늘었다.

이런 어려움에 결국 떠났지만 A출판사는 여전히 파주출판단지에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제는 수적으로 많은 출판사가 입주하는 것보다, 책을 매개로 특별한 콘텐츠를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서울과 비교해선 극복이 안 되죠. 출판문화 중심지로서 정체성을 강화해야 해요."


파주단지 산파 역할한 '터줏대감' 열화당

8일 경기 파주출판문화단지 내 열화당 책박물관 내부. 최주연 기자

"세월이 지났으니 업체들이 나고 드는 건 당연하죠. '죽은 도시'라는 표현엔 동의할 수 없어요."

이수정 열화당 실장은 파주출판단지 역사를 초창기부터 목격한 베테랑 편집자다. 이기웅 열화당 대표는 1980년대 단지 추진 단계부터 출판인들을 이끌었고, 열화당은 2004년 파주에 둥지를 틀었다. 강남구 신사동에서 이사를 준비하던 20년 전의 분주함과 긴장감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파주 시대를 선도한 열화당이지만, A출판사가 겪은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다. 사옥 이전을 이유로 직원들이 얼마간 퇴사했고, 이주 초반엔 서울에서 경험하지 못한 여러 책 관련 행사 업무에 적응하느라 진땀을 뺐다. 넓은 사무실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과제였다.

그렇게 10년쯤 지나자 출판단지의 체계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는 인상을 받았다. 생산 과정을 적극 외주화하며 빠른 호흡으로 책을 내는 출판사들과 달리, 열화당은 기획부터 편집·디자인·마케팅 등 출판 공정 전반을 인하우스 방식으로 수행하고 있어 파주 정착이 보다 수월했던 측면도 있다.

신사동 사옥에서 경험 못한 여유로운 공간은 편집자 간 교류를 중시하는 열화당 정신에 부합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긴 호흡으로 책 한 권을 경험하며 관련 요소를 총체적으로 꿰고 동료들과 잘 소통해야 하거든요. 그런 면에선 출판도시가 적합하죠."

지난해 5월 파주출판문화단지에서 진행된 제23회 어린이책잔치 현장. 출판도시문화재단 제공

그러고도 남는 자리엔 직원들이 업무에 참고하는 책을 꽂았다. 책이 점점 쌓이자 2009년 증축을 계기로 "제대로 된 도서관 겸 책방을 만들어 보자"며 2층 규모의 책방을 조성했다. 열화당 소장 도서를 전시 등 형태로 단지 내 출판인들과 공유하자는 취지였다.

열화당이 수십 년간 국내외에서 수집한 고서·양서에 대한 관심은 기대 이상이었다. 2012년 7월 책방을 책 박물관으로 바꿔 일반에 공개했다. 현재는 매년 한두 차례 기획 전시를 열고 담당 학예사가 회차당 평균 10명의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영상음원·디자인·예술 등 다른 분야 종사자와 일터에서 자주 마주치는 경험도 좋은 자극이다. 일례로 열화당은 파주단지에서 영화교육에 주력하는 명필름과 공동 기획을 통해 주성철 기자가 쓴 ‘우리 시대 영화 장인’을 2013년 6월 펴냈다.

이 실장에게 파주는 출판 중심지로서 고유한 정체성과 역량을 지닌 장소이자 일하는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할 공간이다. "파주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누군가는 공동화 현상을 부각시키지만 출판단지의 역할을 폄하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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