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65일이 지뢰밭"…李 대통령 저격에 기업들 '초비상'
"기업들 참사일 달력 챙겨라"

최근 스타벅스코리아의 5·18 '탱크데이' 논란으로 촉발된 기업의 역사·참사 마케팅 비판에 이재명 대통령이 잇달아 가세하면서 유통·패션업계 전반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이 대통령은 스타벅스의 세월호 참사일 이벤트와 무신사의 과거 광고까지 직접 저격하며 "악질 장사치의 패륜 행위",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 있나"라며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통령의 직접적인 대기업 저격이 반복되면서, 기업들이 1년 365일 중 수많은 참사와 비극이 일어난 날을 일일이 피해 이벤트를 기획해야 하는 ‘역사·참사 리스크 관리’ 부담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 논란의 시작은 스타벅스 '탱크데이'와 무신사 '탁쳤더니 억'
이번 논란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전후해 스타벅스코리아가 진행한 '탱크데이' 마케팅에서 시작됐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탱크 진압을 연상하게 한다는 거센 비판이 일자, 이 대통령은 즉각 SNS를 통해 "대한민국 공동체와 민주의 가치를 부정하는 저질 장사치의 비인간적 막장 행태"라며 강하게 분노했다.
대통령의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 20일에는 패션 플랫폼 무신사가 7년 전인 2019년에 게재한 양말 광고 카피를 소환했다. 당시 무신사는 속건성 양말을 홍보하며 "책상을 탁 쳤더니 억하고 말라서"라는 문구를 사용해,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희화화했다는 비판을 받고 공식 사과했다. 이 대통령은 이를 두고 "돈이 마귀라지만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럴 수가 있냐"며 6월 민주항쟁을 모욕한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해당 건은 별도의 할인이나 프로모션이 들어간 '이벤트'가 아니라 스타벅스코리아의 상시 판매 라인업인 '사이렌 클래식 머그·텀블러'의 정기 출시 공고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사이렌(Siren)'은 스타벅스가 1971년 창립 이후 55년 동안 사용해 온 고유 로고(BI) 브랜드명이다. 통상 유통업계의 봄철 신제품 라인업 출시 일정이 매주 화요일 주기로 편성되는 과정에서 우연히 날짜가 겹친 것으로 보이며, 이를 세월호 참사와 의도적으로 연결 지어 '조롱 코드를 숨긴 암호'라고 단정하기에는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 4·16 세월호 당일 '사이렌 컵' 출시까지…대통령 "악질적 패륜"
23일 이 대통령은 정진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의혹 제기를 공유하며 스타벅스를 향해 또 한 번 직격탄을 날렸다. 스타벅스코리아가 지난 2024년 세월호 참사 10주기인 4월 16일에 '사이렌 클래식 머그' 시리즈를 출시하는 이벤트를 열었다는 점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 '사이렌'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키는 존재라는 점을 들어, 정 의원과 이 대통령은 "하필 배가 난파한 세월호 참사 당일에 조롱 코드를 감춘 암호 같은 행사를 시작해 희생자들을 모욕했다"고 규정했다. 이 대통령은 이를 "일베 보관소도 아니고 대기업 공식 행사라는 점에서 더 할 말이 없다"며 "상습적으로 국가폭력과 참사 희생자들을 능멸하는 금수 같은 행태"라고 일갈했다.
◇ 기업들이 마주한 '달력 리스크'…과거 참사일은 언제
정치권의 이러한 강경 기조 속에서 산업계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의도적인 비하가 아니더라도 날짜나 단어의 상징성이 우연히 겹칠 경우 순식간에 '패륜 기업'으로 낙인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현대사에는 수많은 시민과 어린아이들이 목숨을 잃은 가슴 아픈 참사일이 촘촘히 기록돼 있다.
세월호 침몰 참사일은 2014년 4월 16일. 2014년 고등학생을 포함한 304명이 사망·실종된 참사기 때문에 해상 안전 및 청소년 관련 키워드와 결부될 경우 극도로 민감하다.

2월 18일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벌어진 날이다. 2003년 방화로 인해 192명이 사망한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으므로 대중교통이나 공공 인프라 관련 마케팅 시 금기시된다.
6월 29일에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1995년 부실 공사로 백화점이 무너져 502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다. 쇼핑몰 및 유통업계 이벤트 시 각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날이다.
1999년 6월 30일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에서는 유치원생 19명을 포함해 23명이 숨졌다. 어린이날 전후만큼이나 아동 대상 마케팅에서 신중해야 하는 날짜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는 핼러윈을 앞두고 159명이 사망하는 전대미문의 압사 참사가 벌어졌다. 축제 및 야외 이벤트, 핼러윈 마케팅 자체가 대폭 축소되는 계기가 됐다.
이 밖에 10월엔 유난히 대형 참사가 많다.
1993년 10월 10일엔 전북 부안 위도 앞바다에서 서해훼리호 여객선이 과적과 기상 악화 속에서 무리하게 출항했다가 침몰해 292명이 숨졌다. 세월호, 남영호와 함께 대한민국 3대 해양 참사로 꼽히며, 가을철 레저·여행 마케팅 시 상징성이 겹칠 가능성이 있다.
1994년 10월 21일 출근길 성수대교에서는 교량 상판이 무너지면서 버스 등에 타고 있던 직장인과 등교하던 학생 등 32명이 사망했다. 토목·건설 분야뿐만 아니라 '안전' 키워드와 관련해 매년 회자되는 날이다.
10월 30일은 인천 인현동 상가 화재가 일어난 날이다. 1999년 호프집에서 불이 나 건물에 있던 청소년 등 56명이 숨지고 109명이 다쳤다. 출입구를 봉쇄한 불법 영업으로 인해 학생들의 피해가 컸던 만큼, 씨랜드 참사와 더불어 아동·청소년 타깃 마케팅에서 매우 조심스러운 날짜라고 할 수 있다.
◇ 마케팅 부담 호소하는 기업들 "365일 지뢰밭"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역사적 비극을 풍자하거나 조롱하는 마케팅은 당연히 근절돼야 마땅하지만, 정상적인 비즈니스 스케줄까지 '암호 풀이식' 검열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과도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업계 관계자는 "5·18에 탱크, 박종철 열사에 '탁쳤더니 억'처럼 직접적인 연상 카피는 기업의 명백한 잘못이자 불찰이 맞다. 하지만 브랜드의 고유 로고인 '사이렌' 제품을 봄 시즌 일정에 맞춰 출시한 것까지 '배 난파 신화'와 엮어 세월호 조롱이라 비판하면, 기업들로서는 1년 365일 중 참사일과 비극적 기념일을 모두 빼고 언제 이벤트를 해야 할지 막막하다. 마케팅 달력이 온통 지뢰밭이 된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이미 7년 전 세 차례 사과하고 유가족을 직접 찾아 용서를 구한 뒤 조용히 추모 사업을 후원해 온 무신사의 사례처럼, 과거의 잘못까지 정쟁의 도구로 재소환되는 현상에 대해 기업은 심각한 대외 리스크 부담을 느끼고 있다. 전문가들은 역사적 감수성을 높이는 내부 필터링은 강화하되, 단순한 우연이나 무지를 악의적인 '조롱'으로 단정 지어 마녀사냥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기업의 창의적 활동과 경영 위축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 "대통령 관저 이사일도 참사 1주기"…정치권 번진 '날짜 논란
장동혁 국민의힘 상임선대위원장은 스타벅스코리아의 '사이렌 머그' 출시 공고를 비판한 이 대통령을 향해 "그런 식이라면 4월 16일에는 스타벅스 간판도 가려야 한다"고 반박했다.
장 위원장은 24일 페이스북에 "이 대통령이 이성을 상실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앞뒤 없이 지른다"며 "이제 달력에 참사일을 다 적어놓고 조금이라도 걸리면 다 피해야 할 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해당 사안에 대해 "애초 이벤트는 없었다"며 "사이렌 클래식 신제품이 나왔다고 알리는 평범한 출시 공고"라고 설명했다. 세월호 참사 추모일인 4월 16일에 '사이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문제 삼은 이 대통령의 지적이 과도하다는 취지에서다.
장 위원장은 "이재명은 작년 12월 29일 청와대로 이사했다. 기자들을 만나 활짝 웃는 사진도 많이 나왔다"며 "그날은 바로 무안공항 참사 1주기였다. 무안으로 갔어야지, 청와대 이사했다고 비난하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라고 역공을 펼쳤다.
앞서 이 대통령은 전날 엑스(X·옛 트위터)에 "세월호 참사 추모일에 사이렌 이벤트라니 제발 사실이 아니길 바란다"고 적었다. 사이렌이 노래로 선원을 홀려 배를 침몰시킨다는 설화 속 존재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일베보관소도 아니고 대기업 공식 행사라는데 더 할 말이 없다"며 "유가족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국민이 슬픔에 빠져 있을 때 희생자들을 모욕하고 국민을 우롱하며 즐겼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 위원장은 이 대통령의 기존 표현을 인용하며 "이재명이 쓴 그대로 돌려주면 "참사 추모일을 맞아 유가족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국민이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이사를 하며 희생자들을 모욕하고 국민을 우롱하며 나름 즐겼겠지"라는 취지의 문장을 덧붙였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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