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냉대해도, 그럼에도…남북관계 향한 간절한 마음, 수원운동장 달궜다

김병관 기자 2026. 5. 24.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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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경기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과 일본 도쿄 베르디 벨레자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결승전이 내고향의 승리로 끝나자 공동응원단이 막대풍선을 부딪치며 축하해주고 있다. 김병관 기자
남북관계가 잘 돼서 북한 관광이 다시 열리면 이제 흙이 돼버린 할아버지 유골 한 움큼을 그토록 가고 싶어하셨던 묘향산 자락에 뿌려드리고 싶어요.
- 실향민 3세 신현주씨(50)
후손들이 전쟁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강민조 회장(84)
남북이 적대적 관계로 남아 있으면 경제적으로도 피해가 심하잖아요. 비굴하지는 않되, 넓은 마음으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면 좋겠어요.
- 심리치료사 남모씨(51)

뙤약볕이 내리쬔 23일 오후 2시 경기 수원종합운동장.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내고향)과 일본 도쿄 베르디 벨레자(베르디)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챔피언스리그(AWCL) 결승전 시작과 함께 “내고향”을 외치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남북 교류협력단체 중심으로 꾸려진 공동응원단은 ‘우리 선수 힘내라’ ‘힘내라 코리아’ ‘승리를 넘어서 BEYOND VICTORY’ 등이 적힌 응원 수건을 흔들며 내고향 선수들을 응원했다. 관중석엔 노랑·파랑·빨강·주황색 응원용 막대풍선도 등장했다. 내고향 선수들이 공을 몰고 베르디 골대에 다가서면 “골!”을 외쳤고, 득점 기회를 놓치면 “괜찮아 내고향 힘내라 내고향”이라는 격려가 이어졌다. 응원단은 ‘오 필승 코리아’를 ‘오 필승 내고향’으로 바꿔 불렀다.

이날 내고향은 베르디를 1 대 0으로 꺾고 대회에서 우승했다. 2670명의 시민들이 경기장을 찾아 결승전을 지켜봤다. 공동응원단에 참여한 시민들은 꽉 막힌 한반도 정세 속에서도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저마다의 희망을 품고 응원을 펼쳤다.

작은 가능성 있다면…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들

경기장을 찾은 시민들은 경색된 남북관계 속에서 내고향 축구단의 이번 방남이 남북 긴장해소의 작은 실마리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이날 응원단에 참여한 신현주씨(50) 조부의 본가는 함경북도 평산이다. 실향민 3세인 신씨는 “북한에 ‘우리는 우리대로, 너희는 너희대로 살더라도 우리는 진심으로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응원하러 왔다”고 말했다.

신씨는 “북한이 만약 경기를 방송한다면, 공동응원단이 안 나온 장면을 쓰려고 해도 골 넣는 장면 등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응원단이 보이지 않겠나”라며 “북한에 우리는 흡수 통일하려는 게 아니고 평화공존을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열심히 응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씨는 “할아버지는 살아생전 늘 고향을 그리워했는데, 만약 남북관계가 잘 돼서 북한 관광이 재개되면 할아버지 유골을 묘향산 자락에 뿌려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강민조 회장(84)은 “후손들이 전쟁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오늘은 작은 축구공일 뿐이지만, 이 공으로 남북이 교류하고 통일의 물꼬를 터서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조가 되고 싶어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북쪽 선수들이 남쪽에 와서 경기를 하면, 북쪽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든 응원을 통해 ‘우리는 여러분을 한민족으로 바라보고 있다’ ‘언제나 안을 자세가 돼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며 “남북의 민간이 교류하면 서로 정이 들고 그러다 보면 정치적 문제도 풀릴 수 있다”고 했다.

심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는 남모씨(51)는 “남북이 적대적 관계가 되면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입지 않느냐”라며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밀면 좋겠는데, 스포츠 교류가 관계가 개선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과 일본 도쿄 베르디 벨레자의 AWCL 결승전이 열린 23일 경기 수원종합운동장에서 공동응원단에 참여한 시민들이 북을 치며 내고향을 응원하고 있다. 김병관 기자
뙤약볕보다 뜨거웠던 응원…내고향은 차가웠다

공동응원단의 열띤 응원에도 내고향 선수들은 응원단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선수들은 경기 종료 후 인공기를 들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면서도 응원단을 향해 별도 인사는 하지 않았다. 시상식 이후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선수들을 향해 공동응원단이 큰 소리로 “내고향”을 외쳤지만 선수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관중석에선 “내고향 이쪽으로 와” “얘들아 이리 와라” 같은 외침도 나왔다.

리유일 내고향 감독은 한국 기자의 ‘북측’ 호칭에 불만을 드러냈다. 경기 후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한 한국 기자가 “‘북측’ 여자축구가 과거부터 수준이 높다”라고 하자 리 감독은 “호칭을 좀”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이후 북한 통역관이 “우리 국호를 바로 불러 달라”며 “저 사람 질문은 받지 않겠다”고 했다. 리 감독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회견장을 떠났다.

내고향 선수들은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도 경기 소감 등을 묻는 한국 취재진에 답하지 않았다. 선수들은 무표정으로 정면만 본 채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곧장 탑승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언한 ‘적대적 두 국가’ 기조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23일 경기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AWCL 결승전에서 우승한 내고향여자축구단 선수들이 인공기를 펼치고 그라운드를 달리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이 냉대해도…바늘구멍이라도 뚫고 싶은 마음들

공동응원단에 참여한 시민들은 북한 선수들의 냉담한 반응을 이해하는 쪽에 가까웠다. 시민들은 “당국의 통제를 받을 테니 이해한다” “지금 남북관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내고향 깃발을 들고 응원을 하고 있었던 회사원 송기현씨(69)는 “선수들 마음속에서는 변화가 생기지 않겠나”라며 “북한에서도 이런 장면을 다 볼 텐데, 그 사람들도 사람인 이상 ‘우리 선수가 가서 뛰는데 이렇게 응원을 해주는구나’ 이런 감정이 들 것”이라고 했다.

북향민인 유튜버 김서아씨(30)는 “선수들은 (북한에서) ‘한국은 적’이라고 교육받았는데, 이렇게 응원을 들으면 분명히 다른 마음이 들 것”이라며 “힘들게 뛰고 있는데 누군가 응원해주면, 더군다나 본인들이 이겼으면 얼마나 ‘심쿵’하고 짠하겠나”라고 했다. 다만 김씨는 “북한 당국은 우리가 응원했다고 해서 대화에 나서겠다는 생각을 ‘1’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선수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왔다는 식으로 이번 경기를 체제 유지에 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북한학을 공부하는 박혜정씨(31)는 “우리는 응원을 열심히 했는데 화답을 못 받은 것 같아서 섭섭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우리는 할 도리를 다 했으니 북한 측도 반응을 보여라’라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정부가) 낼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박씨는 “만약 상대가 싫다고 했을 때 우리도 똑같이 싫다고 하면 관계가 끝나는데, 그래도 한쪽에서 ‘이야기라도 해보자’고 하면 관계 회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한국에서 또 스포츠 국제대회가 열리면 이번 대회에서의 경험이 (북한 팀이 또다시 참여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고, 이후 남북관계 개선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3일 경기 수원종합운동장 관중석 한 편을 남북 교류협력단체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공동응원단이 메우고 북한 내고향여자축구단을 응원하고 있다. 김병관 기자

수원 | 김병관 기자 bg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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