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청년들에게 총을 쐈나 ‘3·1절 남대문 총격 사건' [호준석의 역사전쟁]

호준석 국민의힘 전 대변인, 현 서울 구로갑 당협위원장 2026. 5. 24.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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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 3·1운동 28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따라 곳곳에서 좌익이 우익과 충돌해 16명이 숨지고 22명이 다쳤습니다.(조선일보 1947년 3월 4일 자) 특히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좌·우익 청년들의 대규모 투석전은 정체불명의 총격에 청년 2명이 목숨을 잃는 유혈 사태로 비화돼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총을 쏜 것인가, 진실 공방이 벌어졌던 해방 정국의 그날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3월 1일 오전 11시 30분. 남로당은 서울 남산공원에서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좌파 정당 및 사회단체 연합체) 중심으로 ‘3·1 기념 시민대회’를 열었습니다. 좌익 정당 지도부와 민청(조선민주청년동맹, 남로당 전위 조직) 조직원 등이 참석해 오후 3시까지 집회가 계속됐습니다. ‘박헌영 체포령 취소, 전평(전국노동조합평의회) 간부 즉시 석방, 토지 국유화’ 등이 이들의 구호였습니다.

낮 12시 우익은 동대문의 서울운동장에서 ‘기미독립선언 전국대회’를 열었습니다. 백범 김구 등 임정 요인, 존 하지 미 군정청장을 대신한 브라운(Albert E. Brown) 소장, 아처 러치 군정장관을 대리한 윔스(Weems) 소령, 유어만 중국 총영사 등이 참석했고, 참가자들은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외치고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보내는 메시지를 결의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대회는 1시 30분쯤 끝났습니다. 주최 측은 폐회를 선언했지만 우익 학생들이 중심이 된 학련(전국학생총연맹)은 가두행진에 나섰습니다. 대규모 행렬이 동대문-종로-미 군정청(중앙청)-서대문 사거리-서울역 광장을 거쳐 남대문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각. 좌익 청년들이 기념식을 끝내고 구 조선신궁(현 남산도서관과 분수대 자리) 길로 남산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남산 아래 남대문에서 양측은 맞닥뜨렸습니다. 3시 40분쯤이었습니다. 해방 후 1년 반 동안 계속된 좌우의 극한 대립, 그리고 다섯 달 전 남로당의 폭력 전술로 일어난 대규모 유혈 사태 ‘대구 10월 사건’으로 청년들의 감정은 격화돼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어느 편에선가 먼저 돌을 던지자 ‘와, 와’ 하는 함성과 함께 서로 돌팔매질을 하는 투석전이 시작됐습니다. 몇몇이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돼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총성이 들려왔습니다.

“좌익 군중은 남대문으로 내려오는 남산길에서 사정없이 돌멩이를 내려 던졌다. 반사적으로 우리는 몸을 피하며 역습의 전열을 가다듬는데 그들은 높은 지대, 우리는 낮은 지대라 세가 크게 불리했다. 할 수 없이 돌격조가 백병전을 감행하는 순간 뒤에서 콩 볶는 듯한 총성이 들리지 않는가. 내 옆에 있던 이승철 군(경기중) 등 수십 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대열은 금세 아비규환이 되었다. 남대문 돌담에 얼굴을 파묻는 사람, 지하도에 꼰두박질하는 사람 등 참상은 더욱 처절했다.”(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 당시 학련 의장)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등 경찰 간부들이 현장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사상자가 속출하고 양측 군중 다수가 흩어진 상태였습니다.

“나는 선두 지휘차 나온 장택상 청장 앞으로 달려가 웃옷을 걷어 올리며 ‘내 배에 총을 쏘시오’라고 악을 썼다. 그때까지도 나는 공산당이 총을 쏜 것인지 경찰이 좌우 충돌을 진압하려고 총을 쏜 것인지 분간을 못 했고 다만 수도 서울의 대로상에서 우리의 어린 학생이 총 맞아 죽는 것을 보고 내 정신이 아닌 상태가 됐다. 악을 쓰고 통곡했다. 그때 이후 내 목소리는 오늘까지 심하게 쉰소리가 난다.”(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 당시 학련 의장)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충격적 사건이었습니다. 16세 정인수 군과 26세 박수호 씨 등 청년 2명이 목숨을 잃고 5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희생된 조선중학교(현 서울고) 학생 정인수 군은 홀어머니 슬하의 외아들로 고학을 해온 소년이었습니다. 우익 학생들은 정군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안국동의 학련 본부까지 울며 걸어갔습니다. 그날 밤 늦게야 외아들이 죽은 것을 알고 달려온 정군의 어머니와 누나는 통곡했습니다. 김구, 조소앙, 김성수 등 우익 지도자들이 줄지어 빈소를 찾아 조문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다음날 여러 신문이 ‘3.1경축 축전 끝에 좌,우익 단체가 충돌해 불상사가 벌어졌으며 경찰의 발포로 수명의 사상자를 내었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러자 수도경찰청이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경찰의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경찰의 발포라고 썼는지 밝히라고 하자, 기자들은 경찰이 아니면 누구의 총에 맞았겠느냐고 맞섰습니다. 이 문제는 수도경찰청과 출입기자단의 감정싸움으로 치달았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경찰의 입장에는 수긍할 면이 있었습니다. 1946년 10월 대구경찰서에서의 발포나 1947년 제주 3.1발포사건 등과는 달리 남대문에서는 경찰이 위협을 받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좌우 충돌도 대규모 소요로 번질 만큼 극렬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경찰이 갑자기 총을 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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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9일 후인 3월 10일 경찰이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내용은 놀라왔습니다. 당시 경찰은 쌍방의 충돌을 막기 위해 경계 임무를 하다 우익 측 행렬 선두에서 목봉을 가지고 좌익에 접근하려 하자 이를 제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익과 좌익의 투석전이 시작됐을 때 일화빌딩 쪽에서 여러 발의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경찰이 이를 제압하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하면서 5분간 총성이 계속됐습니다. 숭례문 바로 앞에 있었던 일화빌딩(남대문로 5가 29번지)은 1928년 일본의 일화(닛카)생명보험 사옥으로 지어진 건물로 당시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경찰 수사 결과, 일화빌딩 2층과 옥상에서 괴한 여러 명이 우익 학생을 향해 사격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건물 옥상에서 길거리로 떨어진 보자기에서 소련 국기와 삐라, 소련 군표(군이 발행한 화폐)를 발견했고 미군 수사과장 리드 대위를 비롯한 4명이 이를 확인했습니다. 또 23살 이만영 등의 진술로 일화빌딩 옆 계단의 군중 속에서 권총이 발사된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일화빌딩에는 남로당 본부와 민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남로당은 해방 직후 서울에서 가장 비싼 건물인 소공동 근택빌딩을 접수해 당사로 썼지만, 1946년 같은 건물에 있던 조선정판사를 통해 위조지폐사건를 찍은 사건이 적발돼 근택빌딩이 몰수 처분되자 일화빌딩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입니다. 그 이후 남대문 일대는 남로당의 본산이었습니다. 좌익이 남대문에서 가까운 남산공원, 효창공원 등에서 대규모 집회를 했던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경찰은 남로당 본부에서 총성이 들렸고, 괴한 2명이 남로당 본부 뒤편 담을 넘어 도주했다는 반성환 등 2명의 진술도 확보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총격 피해자들의 탄적(탄환의 흔적)을 조사한 결과 예외 없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사격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좌익이 미리 무장대를 요소에 배치한 뒤 우익측 행렬이 도전한 것을 기화로 발사해 사상자가 났다고 결론 내리고, 혐의자 수십 명을 검거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우익이 서울운동장 기념식 후 허가되지 않은 가두행진을 벌인데 대한 책임을 물어 기념식 사회자였던 임정 요인 엄항섭 등도 구속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이런 수사결과가 발표됐지만 경찰과 맞서고 있던 수도경찰청 출입기자단은 이를 3일 동안이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3월 13일에야 ‘자체 조사 결과 중대한 단서를 잡았다’며, 2-3일 내로 이를 발표하겠다는 단서를 달아 경찰의 수사결과를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틀 뒤인 3월 15일 출입기자단이 발표한 ‘조사 결과’에는 일화빌딩에서 사격이 있었다는 수사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단지 피해자들이 예외 없이 높은 곳에서 아래쪽으로 쏜 ‘고소 하향 사격’에 맞았다는 경찰의 발표와 달리, 피해자 6명 중 3명의 탄적은 수평사격으로 보인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진상 판명까지는 아직 검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기자단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나 남로당이 계획적으로 사격을 시작했다는 사실, 괴한들이 총격 후 남로당 본부에서 도주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반론하지 못했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출입기자단이 경찰 수사결과를 3일이나 지연보도하고, 이어 자신들의 ‘조사 결과’라며 이를 보도하자 수도경찰청은 이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개별적 보도는 가능하지만 출입기자단이 마치 또 하나의 경찰기구인 것처럼 경찰청 안에서 자체 조사결과를 발표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우익 학생단체 학련도 ‘좌익 기자들로만 구성된 출입기자단이 진상을 왜곡하고 있다’며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출입기자단은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언론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며 스스로 수도경찰청에 출입하지 않겠다는 출입 거부 조치로 맞섰습니다. 사건은 이상하게도 경찰과 언론의 대립으로 흘러갔고, 남로당이 사전에 사격을 준비해 우익 학생들을 숨지게 한 사실은 그 뒤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 유튜브 '호준석의 역사전쟁'

3월 9일 오전 11시, 서울 안국동 사거리에서 김구 선생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열여섯 살 조선중학교 학생 정인수 군의 영결식이 치러졌습니다. 우익 학생 등 수많은 조객이 몰려 거리를 메웠고 “인수야! 너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라며 학생 대표가 조사를 하자 식장은 울음바다가 됐습니다. 정인수 군의 시신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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