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의 역설...더 가까워진 한일 관계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2026. 5. 24.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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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112회>]
조선일보 ALC ‘예측불허 트럼프’ 대비 목소리
한미일 협력 세션에 아베 아키에 여사도 참석
리퍼트 “한일 관계 이렇게 좋은 적 없었다”
하기우다 “일한은 경제적으로 운명공동체”
조선일보가 20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개최한 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ALC)는 ‘대변혁의 시대: 새로운 균형을 향하여’를 주제로 진행됐다. ALC 첫째날 한일관계와 한미일 3국 협력을 주제로 한 세션에 박철희 전 주일대사,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자민당 간사장 대행이 패널로 참석해 토론하고 있다./조선일보

‘대변혁의 시대: 새로운 균형을 향하여’

매년 조선일보가 서울에서 개최하는 (ALC)는 세계 정상급 정치인과 외교·안보 전문가, 기업인, 예술가 등이 한자리에 모여 시대의 흐름을 살펴보는 대표적 글로벌 포럼입니다. 지난 20일부터 이틀간 신라호텔에서 ‘대변혁의 시대: 새로운 균형을 향하여’를 주제로 열린 올해 회의 역시 다양한 글로벌 담론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저는 ALC 첫째 날 한일 관계와 한미일 3국 협력을 주제로 한 세션 사회를 맡았습니다. 이날 세션에는 박철희 전 주일 대사,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 대사,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자민당 간사장 대행이 각각 한미일 3국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객석 맨 앞줄에는 고(故)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부인인 아베 아키에 여사도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쉽게 보기 어려웠던 장면이었습니다.

하기우다 간사장 “박근혜 대통령 때부터 인연”

세션이 시작되자 하기우다 간사장 대행은 준비해 온 원고를 꺼내 들고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발언했습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핵심 측근으로 경제산업상과 자민당 정조회장 등을 지낸 그는 자신과 한국의 인연이 시작된 계기를 “10년 전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당시 일본 내각관방 부장관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 간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이후 한일 관계에 관여해왔다고 했습니다.

조선일보가 20일부터 서울에서 개최한 아시안 리더십 컨퍼런스(ALC)의 한미일 협력 세션에서 박철희 전 주일대사, 하기우다 고이치 일본 자민당 간사장 대행이 경청하는 가운데 마크 리퍼트 전 주한미국대사가 발언하고 있다./조선일보

하기우다는 최근 이어지고 있는 한일 정상 간 셔틀 외교에도 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전날(19일) 다카이치 총리가 이재명 대통령의 고향인 안동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에 앞서 지난 1월에는 이 대통령이 다카이치 총리의 지역구인 나라를 방문했다”며 “불과 반년 사이 두 차례 상호 방문이 이뤄졌다는 것은 양국 정상 간 긴밀한 신뢰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특히 “현재 일한 관계는 양국 정상 간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치·안보는 물론 경제와 문화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서 원만하게 발전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모든 수준에서 대화와 협력의 통로를 더욱 굵고 강하게 만들어 가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날 하기우다의 발언에서 가장 자주 등장한 단어 가운데 하나는 ‘경제안보’였습니다. 그는 반도체와 공급망, 희토류, AI 산업 등을 거론하며 “일본과 한국은 경제 측면에서도 확실히 운명공동체라는 점을 의식하면서 협력을 앞으로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단순한 외교적 수사라기보다 일본 정치권 내부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발언처럼 들렸습니다.

박철희 “한일은 같은 편에 앉아야 한다”

서울대 국제대학원장, 국립외교원장을 지낸 박철희 전 대사는 “우리는 이제 규범에 기반한 국제 질서가 아니라 규범을 깨는 국제 질서를 목격하고 있다”며 한일 협력의 당위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처럼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편에 서기보다 같은 편에 앉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사이버 공간과 해양 공간, 우주 공간 같은 ‘국제 공공 공간’을 함께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단순히 양자 관계 차원이 아니라 국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협력 틀로 한일 관계를 바라봐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의 '한일 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하여'세션에서 아베 아키에 여사가 연설하고 있다./이태경기자

제가 주목해서 들은 것은 그가 단순한 안보 협력을 넘어 글로벌 사우스 문제까지 언급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글로벌 사우스를 대상으로 한국과 일본이 공적개발원조(ODA)를 공동 운영하고 인재 양성 사업도 함께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과거 비동맹 국가들과 상당 부분 겹치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이 강대국 경쟁 속에서 소외되는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이 공동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었습니다. 이는 한일 관계를 단순히 과거사 문제에 갇힌 양자 관계로 볼 것이 아니라 국제 질서를 함께 설계하는 협력 관계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혔습니다.

리퍼트 “중국에 대한 공통 비전은 무엇인가”

마크 리퍼트 전 대사는 “나의 두 자녀(세준·세희)가 모두 태어난 한국에 다시 오게 되어 진심으로 큰 영광”이라며 “좋은 추억이 많아 가능한 한 자주 한국에 오려고 한다”고 말하며 발언을 시작했습니다.

리퍼트는 자신이 “명백한 민주당원”이라고 소개하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당 사람들까지 놀라게 하는 스타일”이라며 “특별히 한국이나 일본만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좌중에서는 웃음이 나왔지만, 동시에 트럼프의 예측 불가능한 정책이 동맹국들에 실질적 불안 요인이 되고 있다는 현실도 느껴졌습니다.

그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겸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한미일 협력을 계속 중시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특히 “한일 관계가 지금처럼 좋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며 최근 양국 관계 개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리퍼트는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서도 조언했습니다. 그는 “인도·태평양에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전략적 합의를 확보하기 위한 지속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중국에 대한 공동 비전은 무엇인가, 북한에 대한 공통된 합의점은 무엇인가를 보다 명확히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주한 미군 감축 가능성은?”

이날 회의에서는 주한 미군 감축 가능성도 논의됐습니다. 저와 리퍼트는 이 같은 문답을 주고받았습니다.

- 최근 한미일 3각 관계 중에서 가장 긴장감이 있는 것이 한미 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독일 주둔 미군을 5000명 이상 감축하겠다고 한 후, 주한 미군도 감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미군 감축 여부와 관련한) 이 사안에 대해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 미군 사령관의 군사적 조언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현재 미군은 병력 수 자체보다는 역량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나는 국방부가 병력 배치를 합리화하고 정상화하려고 시도한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 나는 국방부 아시아태평양 차관보였는데) 우리는 보다 합리적인 병력 배치안을 매우 면밀히 검토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를 실행하기에는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은 이 문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며,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게 접근해야 합니다.)

리퍼트의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브런슨 주한미군 사령관의 판단에 귀 기울이겠지만, ‘동맹 현대화’에 따라 주한미군의 역할 및 감축이 가능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ACSA는 결국 보험 같은 것”

하기우다는 Q&A 시간에 일본 측의 솔직한 입장을 드러내 주목받았습니다. 제가 “트럼프 대통령 같은 비전통적 지도자를 상대로 일본은 어떤 전략을 갖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우리는 전략이 없습니다”라고 답해 청중석에서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의 발언은 ‘농반진반’으로 들렸습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의 전통이나 유산에 얽매이지 않고 매우 독창적인 외교를 전개하기 때문에 대응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미일 동맹은 일본 외교·안보 정책의 기본축인 만큼 흔들림 없이 유지해 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이런 일은 일본 혼자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과 협력해야 한다”며 “일본·한국·미국의 3자 틀 안에서 협력해 트럼프 대통령이 동북아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동맹국 미국 대통령을 믿기 어려운, 이례적인 시대에 한일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발언이었습니다.

박철희 전 대사는 한일 상호군수지원협정(ACSA)에 대해 이재명 정부가 소극적인 이유와 관련해 “국민 정서상 저항감이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는 “일본과 군사 협력을 하면 일본이 다시 한반도에 진출하는 것 아니냐는 감정이 아직 남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박 전 대사는 남수단 파병 당시 우리 군이 일본 자위대로부터 탄약을 지원받았던 사례를 언급하며 “유사시에 대비한 현실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ACSA는 일종의 보험 같은 것”이라며 시급히 체결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2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안리더십컨퍼런스(ALC) 개막식 전경/박성원 기자

ALC 회의장 안팎의 ‘협력’ 강조 분위기

올해 LC에서도 장외 모임이 활발했습니다. 휴식 시간마다 참석자들은 미국의 베네수엘라·이란 공격, 미·중 갈등, 공급망과 에너지 협력, AI 산업, 북핵 문제 등을 놓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자연스럽게 “세상이 갈수록 위험해지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20일 저녁 만찬이었습니다. 각국의 주요 참석자들이 테이블별로 나뉘어 식사를 하던 중 한 인사가 “트럼프 대통령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일 양국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서로 협력하게 만든 점은 오히려 긍정적”이라고 말하자 좌중에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ALC 현장에서 느낀 것은 한일 관계는 이제 더 이상 과거사만으로 설명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러 밀착, 미·중 전략 경쟁, 공급망 재편, AI 경쟁, 중동 위기 같은 거대한 국제정세 변화 속에서 한국과 일본은 점점 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믿음을 주지 못하고, 국제질서가 흔들릴수록 한일 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전략적 필수가 되어가고 있음을 ALC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P.S.] 부산 세계유산위원회와 일본

하기우다 간사장 대행은 일본의 노련한 정치가다웠습니다. 그는 모두발언 상당 부분을 자신이 꼭 강조하고 싶은 현안에 할애했습니다. 특히 오는 7월 부산에서 열리는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일본이 등재를 추진 중인 ‘아스카·후지와라의 궁도(宮都)’를 거론한 것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기우다는 아스카·후지와라의 궁도가 고대 동아시아 국가 형성 과정에서 중앙집권 체제가 탄생하고 확립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일본 고대 문화가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도 공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이어 나라현과 우호 협정을 맺고 있는 충청남도, 그리고 아스카 마을과 자매결연 관계인 부여군이 이번 세계유산 등재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는 점에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하기우다는 “이번 등재가 성사된다면 일한 교류에도 더욱 큰 탄력이 붙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국제회의 무대를 활용해 한일 관계와 문화 교류, 지방 교류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모습에서 일본 정치 특유의 치밀함과 전략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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