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난과 반이민 정서에 흔들린 100년 英 노동·보수 양당제] 개혁당 2석→1454석 '압승'… 패라지, 단숨에 '총리 후보급' 부상

이용성 국제전문기자 2026. 5. 2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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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절 패라지 영국개혁당 대표가 5월 8일(현지시각) 런던 청사 앞에서 지방의회 선거 결과에 대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AFP연합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뿌리가 싹 튼 영국의 선거는 늘 전 세계적인 관심사다. 그런데 5월 7일(이하 현지시각) 영국(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에서 치른 지방의회 선거는 결과적으로 더욱 그럴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전까지 총 2564석을 보유했던 집권 노동당이 1068석으로 내려앉으며 1당 자리를 영국개혁당(Reform UK·이하 개혁당)에 내줬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선거로 무려 1496석을 잃었다. 노동자가 밀집한 잉글랜드 북부 ‘레드월(Red Wall)’ 지역에서 노동당 지지층이 대거 개혁당으로 이탈한 것이 특히 뼈아팠다. 레드월 지역은 ‘영국판 러스트벨트(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로도 불린다.

보수당도 기존 1364석에서 563석을 잃으며 801석만 건졌다. 136개 지방의회에서 5066석을 새로 뽑은 이번 선거는 우리나라 광역·기초의회 선거에 해당한다.

강성 우파 개혁당 약진

기존 지방의회 의석이 2석에 불과했던 강성 우파 성향의 개혁당은 1452석을 더 얻어 1454석을 확보하면서 보수당(1834년 창당)·노동당(1900년 창당) 양강(兩强) 체제를 깨고 1당으로 떠올랐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당과 노동당, 거대 양당이 얻은 합산 지지율이 35%에 불과했다. 100년 가까이 영국 정치를 양분해 온 두 거대 정당의 동반 하락이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개혁당을 이끄는 나이절 패라지 대표가 “총리 후보급 존재감을 확보했다”고 평가했다.

그 밖에 유서 깊은 중도 좌파 자유민주당이 152석을 추가해 844석을 확보했다. 스카이뉴스는 “단순한 항의 투표를 넘어, 기성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전면적인 거부권 행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개혁당의 기세는 잉글랜드를 넘어 스코틀랜드와 웨일스까지 이어졌다. 웨일스 의회 선거에서 96석 중 34석을 차지해 웨일스당(43석)에 이은 원내 제2당으로 올라섰고,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도 17석을 확보해 스코틀랜드국민당(SNP·58석)에 이은 공동 제2당이 됐다. 개혁당이 두 의회에 자력 입성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반(反)난민, 반유럽연합(EU), 반엘리트, 정치적 올바름(PC) 타파 등을 외치는 개혁당의 모태는 2019년 1월 20일 창당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당’이다. 2021년 지금의 당명으로 바뀌었다. 강성 우파긴 하지만,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거나 인종·민족 우월주의를 좇는 극우 정당과는 결이 다르다.

고교 졸업 후 런던 금속거래소(LME)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패라지 대표는 옥스퍼드대,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한 ‘금수저’가 즐비한 영국 정가에서 이단아 느낌이 강했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탈퇴 캠페인을 이끌며 주목받았지만, 8년이 지난 2024년에야 7전 8기로 원내에 입성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본뜬 반이민정책을 주창해 왔으며, 집권 시 불법 이민자 수십만 명을 추방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영국의 트럼프’로 불리는 이유다. 패라지 대표는 2016년 미국 대선 때부터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며 그와 밀착했다. 지난해 9월 백악관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사진도 찍었다. 그러나 올해 초 트럼프 대통령이 덴마크령 그린란드 병합을 추진하자, “(유럽에) 매우 적대적인 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는 좌파도 우파도 없다. 영국 정치의 역사적 변화가 시작됐다”고 논평했다.

반면 노동당 당수인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집권 2년도 채 되지 않아 최대 정치 위기에 몰렸다. 그는 5월 11일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관저 앞에서 한 긴급 성명에서 “선거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면서도 “지금은 물러날 때가 아니라 국방과 에너지 안보 등 국가적 과제에 더 강력하게 대응할 때”라고 말해 사퇴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오히려 자기에게 등을 돌린 의회 비서관들을 교체하는 등 ‘강경 진압’으로 집권 2기 리더십 사수에 사활을 걸었다.

중앙 정치 무대 진출은 미지수

개혁당의 이번 대승은 절반이 훌쩍 넘는 의석수를 가지고도 민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집권 노동당에 대한 심판과 제1야당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보수당에 대한 실망감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스타머 총리는 2024년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의 압승을 이끌면서 취임했지만, 물가 상승, 복지 공약 후퇴 등으로 인해 몇 달 만에 지지율이 20%대로 내려앉았다. 영국의 2025년 경제성장률은 1.3%에 그쳤다. 올해는 이보다 낮은 수치를 기록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스타머 총리는 억만장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 친분이 깊은 피터 맨델슨을 2024년 12월 주미 대사로 임명해 부실 검증 논란도 일었다.

보수당의 경우 총선 참패 이후 당내 내분이 이어지면서 ‘차기 권력’으로서 존재감이 사라졌다. 이에 실망한 보수 성향 유권자가 ‘정치권 엘리트를 심판하자’ ‘이민자 수 제로(0)’ ‘영국인 우선(British First)’ 등의 간결한 구호를 앞세운 개혁당에 끌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난과 반이민 정서로 대승을 거둔 개혁당이 중앙 정치 무대까지 진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개혁당의 중앙 의회 의석수는 650석 중 8석에 불과하다. 2029년 총선까지 돌풍이 이어질 경우 영국 의회가 재편될 수 있다. 다만 영국 총선은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비례대표제가 가미된 지방의회 선거와 달리 결선투표도 비례대표도 없이 오직 1등만 당선되는 승자독식 원칙이 적용돼, 신정치를 내세우는 소수 정당이 의회에 진입하기 어렵다. 전국 득표율이 높더라도 특정 지역에서 1등 하지 못하면 의석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영국의 이번 선거 결과는 기존 중도 정당이 흔들리고 강경 우파·포퓰리즘 정당이 부상하는 최근 서구 정치권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독일은 지난해 2월 총선에서 극우 성향 독일대안당(AfD)이 20.8% 득표율로 제1야당에 올랐다. 프랑스도 2024년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마린 르펜이 이끄는 극우 성향 국민연합(RN)이 집권당을 누르고 압승했다. 네덜란드도 2013년 11월 총선에서 헤이르트 빌더르스가 이끄는 극우 자유당(PVV)이 1당에 올랐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끄는 마가(MAGA·미국 우선주의)가 공화당의 핵심 노선이다.

다수의 전문가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 불안이 정치 양극화를 가속하고 있는 현상에 주목한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란 전쟁에 따른 에너지 가격 급등, 주택난과 실질임금 정체 등이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Plus Point
웨일스 의회에 한국계 첫 입성… 개혁당 조슈아 김

이번 영국 지방의회 선거에서 한국계 후보 여섯 명이 당선돼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우며 영국의 ‘풀뿌리 정치’를 이끌게 됐다. 우선 현직 교사이기도 한 조슈아 김(한국명 김승균)은 웨일스 자치 의회 선거에서 개혁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블라이나이 그웬트·림니·카이필리 선거구에서 비례대표로 출마해 무난히 당선권에 들었다. 영국을 이루는 네 구성국 중 잉글랜드가 아닌 곳에서 지방의회 당선자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자치의회(한국의 국회에 해당하는 하원)에는 아직 한국계가 입성하지 않았다.웨일스 최대 도시 카디프에서 교사로 재직 중인 김씨는 2024년 7월 영국 총선에 개혁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으나, 이번에는 지방 의회 후보로 출마해 정계 입성에 성공했다. 그는 개표가 진행 중이던 5월 8일에도 학교에서 근무하느라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사실이 알려져 화제를 모았다.

잉글랜드 지방의회 선거에서도 한국계의 선전이 두드러졌다. 이번 선거에서 해머스미스·폴럼구 구의원으로 출마한 권보라 후보는 3선에 성공했다. 유럽 최대 한인타운인 뉴몰든이 있는 런던 킹스턴구 구의회 선거에서는 엘리자베스 박, 김동성, 제인 임, 캘럼 솔 모리시 후보가 승리해 전체 48석 중 4석을 한국계가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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