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단지 가자지구에 닿고 싶었을 뿐”···5·18민주묘지서 울린 광주·팔레스타인 연대

김종찬 2026. 5. 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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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류 풀린 김아현 직접 참석
비 그친 묘역에 추모객 발길
광주-팔레스타인 연대 울림
김아현(해초) 활동가가 23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2026들불열사 합동추모식 및 제21회 들불상 시상식에서 들불야학당가를 부르고 있다. 김종찬기자 jck41511@mdilbo.com

“우리가 바란 것은 단지 지중해를 건너 가자에 닿는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향한 국제 시민 항해에 참여했다가 최근 이스라엘군에 억류됐던 평화운동가 김아현(활동명 해초)씨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묵직했다.

23일 오전 10시께 비가 주적주적 내리던 국립5·18민주묘지 한 켠 ‘역사의 문’ 앞에서는 ‘2026 들불열사 합동추모식 및 제21회 들불상 시상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젖은 바닥 위로 행사 관계자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우산을 든 참석자들은 하나둘 의자를 채웠다. 추모식장 뒤편에는 ‘팔레스타인에 광주 오월의 저항 정신과 평화의 기운이 닿기를’이라는 문구가 담긴 현수막과 함께 지난 1대부터 20대까지 수상자들의 이력과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김아현(해초) 활동가가 23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21회 들불상 시상식에서 봉산탈춤 등장인물 중 ‘취발이’ 가면을 선물받고 있다.김종찬기자 jck41511@mdilbo.com

오전 11시 행사가 시작될 무렵 신기하게도 빗줄기는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추모객들은 “열사들이 도와준 것 같다”며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묘역 곳곳에서는 참배객들의 낮은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이 손을 잡고 묘비를 둘러보는 가족, 비석 앞에 한참을 멈춰 서 있는 노인, 묵념 뒤 조용히 눈시울을 닦는 시민들의 모습은 이날 추모식을 더욱 뜻깊게 만들었다.

이날 시상식에서는 올해 들불상 수상자인 김씨가 어렵게 행사에 참석해 직접 수상 소감을 밝혔다. 김씨는 바로 어제 새벽 이스라엘 억류에서 풀려나 무사히 귀국한 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했다.
김아현(해초) 활동가가 23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21회 들불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김종찬기자 jck41511@mdilbo.com

김씨는 이날 광주지역 전통 탈놀이인 봉산탈춤의 등장인물 ‘취발이’를 형상화한 작품을 선물로 받았다. 취발이는 한국 전통 탈춤에서 권력과 위선을 풍자하고 민중의 삶과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기존 질서를 비틀고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상징적 캐릭터다.

김씨는 수상소감에서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땅”이라며 “우리는 그저 바다를 건너 가자에 닿고 싶었을 뿐인데,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현실이 이상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어 “사람이 자신의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굶주리지 않고 폭격당하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며 “광주 시민들이 팔레스타인의 아픔을 민주와 평화의 문제로 함께 바라봐 주셔서 더욱 감사하다”고 했다.

김씨는 이날 수상소감에서 들불열사 중 한 명인 박효선 열사가 약 40년 전 이미 팔레스타인 문제를 작품으로 다뤘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광주와 팔레스타인의 연결성도 강조했다.

김씨는 “박효선 열사께서 1985년 팔레스타인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가산 카나파니가 쓴 소설 ‘하이파에 돌아와서’를 ‘광주는’이라는 제목으로 각색해 공연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또 “이미 40년 전 광주의 문화운동가들은 팔레스타인이 단순한 전쟁 상황이 아니라 식민과 억압의 현실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며 “광주와 팔레스타인의 아픔은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민주주의와 평화의 문제로 바라봐 준 광주 시민들에게 감사하다”며 “광주가 지닌 연대의 정신이 지금도 세계 곳곳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느꼈다”고 이야기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앞서 열린 추모식에서는 들불열사 7인의 삶과 5월 정신을 기리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임낙현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광주의 민주·인권·평화 정신은 지금 세계 곳곳의 국가폭력 현장과 연결돼 있다”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참상을 언급했다.

김순자 광주YWCA 회장도 추모사를 통해 “들불야학은 단순한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사람을 깨우고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다”며 “열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광주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말했다. 이어 양기창 시인은 박효선 열사를 추모하는 시를 낭송했고, 행사장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편 김씨는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운동 현장에서 평화활동을 시작한 뒤 바다를 매개로 군사주의와 전쟁에 맞서는 국제 연대 활동을 이어온 청년 평화운동가다. 그는 지난 2023년 무동력 세일링 요트를 타고 107일간 동아시아 바다를 항해하며 평화와 생명, 반군사주의 메시지를 알렸으며, 이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봉쇄를 뚫기 위한 국제 시민 항해에도 참여했다. 최근에는 세계 각국 시민들과 함께 지중해를 건너 가자지구로 향하던 중 공해상에서 이스라엘군에 나포·억류됐다가 지난 22일 귀국했다.

김종찬기자 jck41511@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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