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노동, 한국형 유연안전성에서 답을 찾다 [김홍유의 산업의 窓]

최근 세계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삼성전자 파업은 초기업노조 중심의 총파업 예고로 시작해 성과급 산정·상한 폐지 등 성과급 제도 중심 쟁점이 핵심이다. 한 회사의 관심을 벗어나 산업과 국가산업 및 세계경제에 많은 시사점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1950년대 전쟁의 폐허와 세계 최빈국의 역경을 딛고 단 몇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1960년대 수출 주도형 경공업으로 시작된 압축성장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으로의 체질 개선을 거쳐서 1980~90년대 반도체와 지식기반 경제로 이어지는 극적인 대서사시였다. 세계가 경탄한 이 ‘한강의 기적’은 전적으로 가난을 털어내고자 밤낮없이 땀 흘리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견뎌낸 우리 부모님과 노동자들의 거룩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위대한 성취였다. 그러나 눈부신 번영의 불빛 뒤에는 정당한 권리를 유예당했던 노동의 아픈 눈물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으며 선 성장 후 분배의 기치 아래 노동의 가치는 자주 소외되었다. 1987년 민주화 열기와 함께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으며,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전투적 노동운동과 강경 진압의 구도는 오늘날까지 대립적 노사관계의 짙은 뿌리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도입된 정리해고제와 파견법은 노동시장을 대기업·정규직과 중소기업·비정규직으로 극단적으로 분절시켜 사회적 연대를 가로막는 깊은 양극화의 골로 남아 있다.
오늘 우리 노사관계는 과거의 낡은 대립 구도를 탈피하지 못한 채 급격한 시대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디지털과 AI 대전환으로, 스마트팩토리의 확산 속에서 고용 형태가 다변화되면서 기존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가 급증하고 있으며, 극심한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구조의 격변으로 산업 현장의 일손 부족과 정년 연장을 둘러싼 세대 간의 일자리 갈등이 날카롭게 맞서는 상황이다. 또한 산업 현장의 주역으로 떠오른 MZ세대의 등장으로 이들은 과거 세대의 맹목적인 희생을 거부하고 일한 만큼 정당하게 보상받는 공정성과 일과 삶의 균형인 워라밸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동시에 기업들은 급변하는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막대한 미래 투자 재원을 확보해야 하고, 예측 불가한 시장 변동성에 대응하기 위해 고정비 부담을 관리해야 하는 경영상의 생존 압박에 직면해 있다. 거대한 시대의 파도를 넘고 난파를 막기 위해서는 대립과 투쟁의 연대기에서 벗어나 상생과 연대의 새로운 페이지를 써 내려가야 한다.
우선 고령화 시대에 지속 불가능한 연공서열형 호봉제를 직무와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로 개편해야 하고, 국가가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과 재취업 인프라를 제공하는 한국형 유연안전성을 확립해야 한다. 특히 기업의 활력을 저해하는 경직된 노동 규제를 완화하여 급변하는 시장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경영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이다. 또한 원청 대기업 노사가 임금 인상을 자제하거나 상생 기금을 조성하여 하청 중소기업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는 등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하고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실현해야 한다. 나아가 기존의 유니언 중심 체계를 탈피해 미조직 약자를 포용하는 노동약자보호법을 제정하고 노사정 대화를 파업 봉합용 기구가 아닌 미래 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상시적 대화 체계로 혁신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기적은 몇몇 영웅의 기록이 아니라 새벽을 깨우며 일터를 지킨 평범한 이들의 헌신이 모인 결과였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성장률의 숫자가 아니라 서로의 일터를 존중하고 성장의 과실을 나누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존엄한 노동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노와 사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가 아니라 거친 바다를 함께 건너는 한 배의 동반자이다. 기업이 노동자를 귀히 여기고 노동계가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고민할 때 대한민국은 갈등을 넘어 다시 한번 세계가 주목하는 상생과 번영의 공동체라는 위대한 기적을 지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김홍유 경희대 교수(전 한국취업진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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