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좀비도 배워야 산다… 연상호의 영리한 진화 ‘군체’

백수진 기자 2026. 5. 23. 06: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 영화 어때]
영화 '군체' 스틸컷 /쇼박스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207번째 레터는 21일 개봉한 영화 ‘군체’입니다. ‘부산행’ ‘반도’에 이어 연상호 감독의 ‘좀비 3부작’을 완성하는 작품이죠. 최근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돼 먼저 공개됐고, 초반에 현지에서 나온 평가는 꽤 엇갈렸습니다. 그래서 기대를 조금 내려놓고 언론 시사회에 갔는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쉬움이 없진 않지만, 좀비물의 지평을 또 한 번 넓힌 신선한 블록버스터였습니다. 연상호 감독의 최근 작품들보다 신파 함량이 줄어서 훨씬 깔끔하게 즐길 수 있었고요. 좀비 떼에 쫓기듯, 시작부터 피날레까지 지루할 틈 없이 내달립니다.

'군체' 스틸컷. /쇼박스

영화는 서울 도심의 초고층 빌딩에서 천재 생물학자 서영철(구교환)이 생물학적 테러를 예고하면서 시작됩니다. 곧 빌딩 안에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지고, 감염자가 속출합니다. 자신은 백신을 맞았다고 주장하는 서영철은 백신 확보를 위해 반드시 생포해야 하는 당국의 타겟이 됩니다.

바이오 기업의 컨퍼런스를 찾았던 생명공학과 교수 권세정(전지현)은 봉쇄된 건물에 갇히게 됩니다. 세정은 생존자들과 함께, 감염자들이 득실거리는 쇼핑몰을 뚫고, 구조대가 있는 옥상까지 올라가려 합니다. 문제는 봉쇄된 건물에서 나가려면 어찌됐든 서영철이라는 ‘인간 백신’이 필요하다는 것. 결국 이들은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서영철까지 데리고 옥상으로 올라가야 하고, 위험한 적과의 동행이 시작됩니다.

영화 '군체' 스틸컷 /쇼박스

재난물에서 익숙하게 봐 온 캐릭터들이라 어느 정도 전개가 예측 가능하긴 합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주인공, 비뚤어진 과학자, 우애 좋은 남매, 목소리 크고 민폐만 끼치는 날라리, 그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여리고 착한 학생까지….

유일하게 뻔하지 않은 캐릭터가 있다면, 바로 좀비들입니다. ‘부산행’이 달리는 좀비로 ‘K-좀비’ 장르를 개척했다면, ‘군체’의 좀비는 세상에, 글도 읽고, 말까지 합니다. 개미나 균류 같은 군체 생물을 연구해 온 서영철은, 이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고 소통하는 방식을 인간에게 적용합니다. 감염자들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면서 점점 더 영리하게 진화합니다. 점점 똑똑해지는 좀비들 때문에 실소가 터지는 장면도 있고요. ‘학습하는 좀비’로 한 단계 더 진화한 K-좀비를 보여줍니다. 누가 한국 좀비 아니랄까봐, 살아남기 위한 학습력이 남다릅니다.

영화 '군체' 스틸컷 /쇼박스

비주얼적으로도 진화했는데요. 균사체를 닮은 하얗고 끈적이는 점액질은 이들 사이에서 일종의 네트워크 역할을 합니다. 피와 점액으로 범벅이 된 감염자들은 한층 더 불쾌하고 기이한 비주얼을 자랑합니다. 달리고 물어뜯는 게 전부였던 기존 좀비들과 달리, ‘군체’의 감염자들은 서로 들러붙어 하나의 거대한 생물처럼 움직입니다. 한 명이 보고 들은 것은 전체에 공유되고, 한 명이 무언가를 습득하면 자동으로 전체 동기화됩니다.

자연스럽게 인공지능(AI)이나 소셜미디어 같은 현대의 기술이 떠오릅니다. 연상호 감독은 AI의 작동 원리를 찾아보다가, 작품을 구상하게 됐다고 합니다. 온라인으로 서로가 촘촘히 연결되고, 모두의 생각이 실시간으로 교류되는 세상에서, 집단의 힘은 커지고,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점점 더 무력해진다는 것이죠. ‘군체’의 좀비들은 그러한 공포를 육체화한 존재들처럼 보입니다. 동시에 생각하고, 동시에 업데이트되고, 동시에 움직이는 세계. 그 속에서 온전한 ‘개인’으로 남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철학적인 은유를 걷어내고 봐도, 그냥 액션 영화로서도 꽤나 재밌습니다. 둔기·흉기·총기·차량 액션까지 총출동하는 대규모 좀비 블록버스터입니다. 집단 지성으로 점점 진화하는 좀비와, 생존을 위해 점점 야만성을 드러내며 갈수록 퇴화하는 듯한 인간들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영화 '군체' 스틸컷 /쇼박스

감염자들의 행동 패턴을 읽어낸 권세정은 이를 역이용하려 합니다. 모두가 동시에 정보를 업데이트한다면, 반대로 가짜 정보를 흘려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는 거죠. 영리한 주인공이 기지를 발휘해 하나씩 관문을 돌파해 나가는 과정은 마치 게임의 스테이지를 깨는 듯한 스릴을 줍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구멍 없이 두루 좋습니다. 전지현 배우는 ‘암살’ 이후 11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엔 교수 역할이 안 어울리지 않을까 의심하면서 봤는데, 어느새 푹 빠져서 보게 됐고요. 생존자 그룹의 리더이자 불의를 참지 못하는 과학자 권세정을 안정감 있게 연기합니다. 유일하게 이 아수라장을 유유히 돌아다니는 구교환 배우의 빌런 연기도 일품입니다. 조금만 삐끗하면 식상하거나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캐릭터인데, 딱 은은하게 돌아있는 캐릭터를 징그럽게 잘 표현하더라고요.

영화 '군체' 전지현 스틸컷 /쇼박스

주인공 권세정은 모두가 한 방향으로 달려갈 때, 끝까지 의심을 거두지 않고 다른 의견을 내는 인물입니다. ‘군체’가 말하는 인간다움은 그런 차이와 개성에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요즘의 유튜브나 소셜미디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모두가 혹평해도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영화가 있고, 모두가 찬사를 보내도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영화들이 있잖아요. 그런 어긋난 취향이야말로, 나만의 뾰족함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고를 때도, 남들의 평가만 보고 너무 쉽게 지나치지 마시고, 직접 보고 느끼고 판단해보시길 조심스럽게 권합니다. 그러다가 뜻밖의 보석 같은 영화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요. 나만의 취향으로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AI 시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닐까요. 그럼 오늘 레터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는 세상의 창이고 호수이며 거울. 여러분을 그 곁으로 데려다 드립니다.
그 영화 어때 더 보기(https://www.chosun.com/tag/cinema-review/)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