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 배우로, 58세 작가로 신인상… “삶은 끝까지 봐야 아는 장편소설”
신간 소설로 돌아온 작가 겸 배우 차인표
배우 차인표(59)는 무명 시절이 없었다. 1993년 MBC 공채 탤런트 시험에 합격, 이듬해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로 신인상 수상과 동시에 단박에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작가 차인표는 달랐다. 2009년 첫 장편소설 ‘잘가요, 언덕’을 냈으나 찾는 사람이 드물어 절판됐고, 2011년 출간한 소설 ‘오늘 예보’도 같은 수순을 밟았다. 그가 쓴 책은 아이돌 화보집과 여배우 메이크업북과 같은 매대에 놓였다. 작가 차인표가 아닌 배우 차인표에 더 방점이 찍힌 것이다.

차인표가 작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건 최근 일이다. 2021년 청소년 참고서를 제작하는 출판사에서 복간을 제안해, ‘잘가요, 언덕’이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으로 제목을 바꿔 다시 세상에 나왔다. 3년 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언젠가…’를 한국학과 교재로 쓰고 싶다는 것. 소설은 고국을 떠나 70년 만에 필리핀 작은 섬에서 발견된 쑤니 할머니의 젊은 시절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재조명한다. 옥스퍼드대 교재로 채택되면서 소설 판매량에도 불이 붙었다. 2024년 9월 첫째 주 종합 베스트셀러 1위. 절판된 소설 ‘오늘 예보’도 ‘그들의 하루’란 개정 증보판으로 다시 나왔다. 작년엔 소설 ‘인어 사냥’(2022년 발표)으로 황순원문학상 신진상을 받았다. 당시 차인표는 수상 소감에서 “42세에 첫 소설을 출간했는데 58세에 신진 작가상을 받는다”며 “인생은 끝까지 읽어봐야 결말을 아는 장편소설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지난 15일 방문한 차인표 사무실엔 막 제작을 끝낸 그의 신간 소설책 ‘우리동네 도서관’이 도착해 있었다. 책 프로필엔 ‘소설가/배우’라 적혔다.
◇배우 겸 소설도 쓰는 차인표
-소설가가 배우보다 앞에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그렇게 썼는데, 스스로 소개하기는 배우 겸 소설도 쓰고 있는 차인표라고 말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입장이 있잖아요. 배우로 오랫동안 활동했고, 이름이 알려지면서 어쩌면 남들보다 책을 쉽게 출간할 수 있었고요. 그런 점 때문에 마음 한편엔 늘 스스로를 소설가라 말하기엔 미안함, 쑥스러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난해 황순원문학상을 받으면서 비로소 ‘앞으로 계속 써도 된다’는 조용한 허락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동네 도서관’은 고구려 시대 용을 그리려는 화공 ‘번각’의 이야기를 집필하는 현대 소설가 ‘나’가 주인공이다. 픽션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소재로 삼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메타픽션(Meta-fiction)’ 구조를 취했다.
-소설 속 ‘나’가 작가 차인표로 읽히는 지점이 많습니다.
“이걸 말씀드리면 독자들 몫인 해석을 제가 강요하는 것 같아서, 그냥 읽는 분들께 맡기고 싶습니다. 사실은 배경이 2026년 대한민국이든, 고구려든, 소설 속 모든 인물은 다 제 내면에서 나오잖아요. 유사성을 따진다면 주인공들 DNA는 같을 겁니다.”
-소설 속 ‘나’는 루틴의 사나이인데, 실제 차인표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오전 6시쯤 일어나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고, 성경 보고, 일기를 씁니다. 그다음 아내(배우 신애라)와 아침 먹고 요즘 같은 경우 연극 연습하고요. 소설 쓸 때는 도서관이나 카페 등으로 자리를 옮겨 하루 5~6시간 정도 글을 써요. 끝나면 운동 갔다가 집으로 오면 하루가 가더라고요. 저는 제 하루가 전날 밤 10시부터 시작된다고 봐요. 밤에 SNS 안 보고, 세상 뉴스 내려놓고 제시간에 잠들 수 있어야 다음 날 일찍 일어날 수 있고, 그래야 아침에 할 수 있는 게 많아집니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이 옥스퍼드대 교재로 선정된 이후이자, 상을 받은 다음 처음 내놓는 소설인데.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처음엔 좀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생각해보니 부담 느낀다고 못 쓰던 글을 잘 쓰게 되거나 문체가 대단히 좋아지거나 이럴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웃음). 그냥 하던 대로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신작에 대한 가족들 반응은요?
“딸들은 읽어주질 않아서(웃음)…. 아내는 ‘어떻게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했느냐’고 칭찬하고요. 책이 나오면 늘 아내에게 제일 먼저 줍니다. 처음 소설을 써보겠다고 했을 때, ‘당신은 잘할 거다’라고 말해준 첫 독자가 아내예요.”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는 1997년 8월 일본군 위안부로 캄보디아에 끌려갔던 훈 할머니가 5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고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이후 완성까지 10년 이상 걸렸다.
-왜 소설이었습니까?
“당시 뉴스를 보는데 여러 감정이 교차했어요. 할리우드 영화처럼 주인공이 일본군에게 복수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잘 풀리지 않는 거예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소설을 왜 쓰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니, ‘위로를 건네고 싶어서’더군요.”
-그래서 복수 대신 용서와 화해로 승화하는 반전을 택한 건가요.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 저는 그게 인간이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이자 어쩌면 유일한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소설인 ‘오늘 예보’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때 동료 연예인들이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하고, 그게 베르테르 효과처럼 대중에게도 번질 때였어요. 당장은 눈앞이 안 보일 정도로 세상이 어렵더라도, 다른 국면이 펼쳐질 수 있으니 서로 위로하면서 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발표한 장편소설 세 편 중 두 편이 10년 새 절판돼 사라졌는데.
“‘인생이 참 공평하구나’ 싶었습니다. 저보다 글 잘 쓰는 사람들도 책 한 권 내기 어렵고, 출판사 찾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쉽게 책을 냈더니, 정작 사람들이 소설로 봐주질 않는 거죠. 제가 받아들여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낙담하지 않고 계속 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어떻게 보면 소설을 써서 뭔가 되겠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장편소설 한 편 완성하려면 저 같은 경우 최소 1년은 걸리거든요. 그러면 제 삶의 한 장이 넘어가는 건데, 지금 쓰는 이 행위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것만 봤던 것 같아요.”
-그러다 책이 베스트셀러 1위까지 올랐죠.
“뭐든 씨 뿌리고 오래 가지고 있으면 때론 의외의 결과가 나오는 것 같아요. 옥스퍼드대 교재로 선정되면서 주목받았는데, 제 소설이 문학적으로 대단해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교재로 선정한 교수님께서 ‘이 책을 유럽 청소년들이 다 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하시더군요. 공감하고, 연대하고 싶은 마음이 살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연극 첫 도전, 어쩌면 내 대표작 될 것
배우 차인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연기에 도전했다.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로 일약 청춘 멜로 스타로 떠올랐지만, ‘별은 내 가슴에’ 출연 이후 주말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왕초’ 등에 출연하며 뻔한 재벌 2세 역할에서 탈피했다.

2001년엔 주말 드라마 ‘그 여자네 집’으로 MBC 연기대상 대상을 받기도 했다. 2005년 ‘홍콩 익스프레스’에서 악역을 맡았던 그가 보여준 ‘분노의 양치질’은 여전히 패러디 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탈북민을 다룬 영화 ‘크로싱’(2008) 출연 이후엔 꾸준히 탈북민을 돕는 활동도 해오고 있다. 드라마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2017)을 비롯해 자신의 이름을 딴 넷플릭스 영화 ‘차인표’(2021)에선 코믹 연기에도 도전하며 제대로 망가졌다. 영화사 ‘TKC픽처스’를 세워 ‘옹알스’(2019)를 만들고, 해외에서 종교 영화 ‘헤븐퀘스트’(2020)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오는 7월엔 데뷔 33년 만에 첫 연극 무대에 오른다고요.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연극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입시와 성공만을 강요받는 학생들에게 진정한 삶의 태도를 깨닫게 해주는 키팅 선생님 역을 맡았습니다. 제가 배우를 오래했지만 연극은 처음 해보는 건데, 가림막 없이 관객과 직접 함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걸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연을 결정한 이유가 있나요.
“36년 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어머니와 동생과 작은 극장에서 봤는데, 보고 나서 너무나 충만해졌어요. 그러다 36년 만에 연극 대본이 들어와서 그때 그 대사들을 다시 보는데, 키팅 선생님 말이 정말 맞았더라고요. 인생은 각자 써 내려가는 시(詩)고, 현재에 집중해서 사는 게 중요하고요. 이번 연극을 통해서 청년들에게 이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연극은 대사만으로 극을 끌고 가야 해 부담을 느끼는 배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모르는 이야기를 달달 외워서 한다면, 힘들 수도 있어요. 살아 봤더니 정말 다 맞는 말이라서, 괜찮은 것 같아요. 화려한 역할은 아니지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어쩌면 이 연극이 제 대표작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연극이 끝난 뒤엔 추석 때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인 영화 ‘크로스2’의 대통령 역할로 시청자들을 만난다.
-최근 강연을 통해 대중과 접점을 늘리고 있는데, 이유가 있나요.
“저는 대중의 사랑으로 30년 넘게 먹고살았잖아요. 그런데 대중은 언제나 무리였을 뿐, 실체를 본 적은 없거든요. 강연이나 북토크에 가보면, 오늘의 나를 먹고살게 해준 분이 누구인지, 한 분 한 분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게 좋습니다.”
◇마음이 주어져 선행을 했을 뿐
차인표는 지난 20일 아시안리더십컨퍼런스(ALC)에도 연사로 나와 ‘인간 욕망의 끝은 어디인가’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지금 우리는 AI와 함께 살아가는 역사상 첫 인류로, 하루 지날 때마다 새 기술이 생겨나고, 한 번도 넘어본 적 없는 경계를 넘으며,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는 중”이라며 “그런데 인간의 욕망과 기술의 속도를 과연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체계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강연 말미 소설 ‘인어 사냥’을 인용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어를 먹으면 천 년을 살 수 있는데, 그 인어가 당신의 자녀를 닮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죠.
“성경이나 신화를 보면 인류는 먹지 말라는 것을 먹어서 죽음의 세계에 들어온 경우가 많아요. ‘인어 사냥’에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선을 넘으려는 사람들에게 딸이 항변합니다. ‘사람은 나 살자고 아무거나 다 해도 되는 건가요?’ 어쩌면 지금 우리는 브레이크가 없는 엄청 좋은 자동차를 타고 달리고 있는 것 아닐까요. 변화와 성장의 한복판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기준과 질서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오랫동안 국제어린이양육기구(컴패션)에서 홍보대사와 후원자로 활동했고, 탈북자와 자립 준비 청년 돕기, 최근엔 마약 퇴치 운동까지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
“‘나는 선행을 할 거야’ ‘착하게 살 거야’ 이런 대단한 신념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사는데, 살다 보니 어떤 마음이 주어지고, 그 마음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기회가 있을 때 필요한 일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약 퇴치 운동은 비전문가인 제가 나서기엔 한계가 있어서 조금 쉬고 있고요. 요즘엔 여러 이유로 예전보다 탈북하기가 쉽지 않아서, 탈북자도 많이 줄었어요. 다만 여전히 제 옷이나 물품은 아내가 주기적으로 정리해서 싹 다 여명학교(탈북 청소년 대상 대안학교)로 보냅니다(웃음).”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지난 3월 산불 피해 이재민을 돕기 위한 성금 1억원을 전국재해구호협회에 기부했고, 지난해 초엔 시설 보호 아동과 자립 준비 청년을 돕는 야나(YANA·You Are Not Alone)에 1억3000만원을 기부했다. 지난 4년간 부부가 야나에 기부한 누적 금액은 5억7613만원이다.
-요즘은 어떤 것에 마음이 가나요?
“청년들이요. 집값도 너무 비싸고, 무엇보다 저희 때는 열심히 하면 집을 살 수 있단 희망이 있었는데, 그것조차 보이지 않잖아요. 다른 방법이 안 보이니 결혼도 안 하려고 하고요. 그런데 이게 청년들 잘못이 아니잖아요. 선배 세대인 어른들 잘못이고, 제 잘못이죠. 우리가 사회의 주역으로 살면서, 다음 청년들이 희망을 품지 못하는 각박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어떤 부채감과 미안함이 있어요. 이번에 연극을 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커요.” 차인표는 “사람은 모두 자신만의 시구(詩句)를 한 구절씩 가슴속에 품고 살아간다고 한다”며 “연극을 보면서 청년들이 어떤 시를 쓸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차인표가 품고 사는 시 구절은 무엇입니까.
“매일 그날 하루씩을 감사와 기쁨으로 살자. 오늘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밤에 잠들 때 ‘잘 살았다’라고 생각하면 그다음 일들은 인간의 손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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