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비만치료제에 헬스장 울상... 옷집과 성형외과는 웃는다

김성윤 기자 2026. 5. 23. 00:32
번역 Translated by kaka i
번역중 Now in translation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비만치료제 열풍으로
바뀌는 산업·사회 지형
일러스트=한상엽

서울 한남동 A주점 대표(37)는 최근 눈에 띄게 턱선이 날렵해지고 배가 홀쭉해졌다. 비만치료제를 사용한 지 2개월 만에 몸무게가 8㎏ 빠졌다. 비만약 덕분에 감량에 성공했지만, 약의 효과는 그에게 새로운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그는 “약을 쓴 이후 술과 음식 생각이 뚝 끊겼다”며 “단골 중에도 비만치료제를 사용하는 분이 많은데 나와 같은 상태일 거라고 생각하니 매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국내 비만치료제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137% 급증한 3억7700만달러(약 5700억원)로 미국·브라질·캐나다·호주에 이어 세계 5위를 기록했다. 성장률만 놓고 보면 상위 10국 중 가장 높다. 이런 추세라면 올해 시장 규모는 7000억원 규모에 달할 전망이다.

마운자로·위고비·오젬픽 등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계열 비만치료제의 폭발적 성장은 산업계 전반에 거대한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외식·식품·배달·헬스·패션·여행 등 다양한 분야의 지형을 바꿔놓고 있다.

음식량 줄이고 영양 밀도는 높여

서울 강남에서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오너셰프 B씨는 코스로 제공하는 요리들을 한입 크기로 줄이되, 양이 적더라도 만족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맛과 식감을 강화한 메뉴를 개발 중이다. 위고비를 쓰고 있는 단골이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며 음식 남기는 모습을 본 것이 계기였다.

최근 국내 외식업계에는 ‘적게 제대로 먹는다’는 철학을 가진 레스토랑들이 비만약 사용자들의 새로운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비건 레스토랑 ‘레귬’, 셰프가 텃밭에서 직접 가꾼 채소로 요리하는 ‘기가스’ 등은 정제 탄수화물을 배제하고 렌틸콩, 귀리, 채소, 생선·닭고기 등 ‘화이트 미트’ 중심 코스를 제공한다. ‘썬더버드 청담’은 혈당지수(GI)를 낮춘 메뉴를 선보인다. GLP-1 비만약 사용자들이 선호하는 고단백 메뉴나 기능성 스무디 등 영양 밀도가 높은 소량 식사가 특징이다.

이런 움직임이 국내에서 막 시작되는 단계라면, 성인 8명 중 한 명이 비만약을 복용한다는 미국에서는 소용량 메뉴가 이미 흔하다. 뉴욕 이탈리아 레스토랑 ‘투치’에서는 한 접시에 3개씩 팔던 대표 메뉴 미트볼을 하나만 주문하는 것도 최근 가능해졌다. 미 전역에 200여 매장을 둔 아시아 퓨전 체인 ‘피에프창’은 기존 메인 요리보다 양이 적은 ‘미디엄’ 옵션을 추가했다. KFC도 미국 내 4000여 매장에서 메뉴 크기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미 필라델피아·워싱턴 등에 여러 지점이 있는 쿠바 음식점 ‘쿠바 리브레’가 내놓은 ‘GLP-원더풀 메뉴’는 양만 줄인 게 아니다. 영양학자·비만 전문가 조언을 받아 GLP-1 계열 비만약 복용자에게 맞춰 영양소 구성을 조절했다.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 함량은 높이고, 더부룩함·메스꺼움·설사를 유발하는 지방은 줄였다. 소화를 돕고 변비 방지를 위해 섬유질과 유산균을 강화하고 당으로 쉽게 전환되는 정제 탄수화물을 최소화했다. 프리미엄 햄버거 체인 ‘쉐이크쉑’은 지난해 말 번(빵) 대신 양상추로 소고기패티·치즈·토마토 등을 감싸 단백질과 채소 함량을 높이고 탄수화물은 최소화한 ‘굿 핏 메뉴(Good Fit Menu)’를 출시했다.

배달 앱 혈당 관리 앱과 연결

식품·건강기능식품 기업들은 식욕 저하와 영양 불균형을 보완하는 전용 라인업을 강화하고 있다. 네슬레 ‘바이탈 퍼수트(Vital Pursuit)’는 GLP-1 사용자 맞춤형 냉동식품 브랜드. 적은 양으로도 충분한 단백질·칼슘·철분 등을 섭취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미국 3대 식품기업 중 하나인 코나그라는 기존 건강식 라인업을 고단백·고섬유질 위주로 재편한 ‘헬시 초이스(Healthy Choice)’에 세계 최초로 ‘GLP-1 친화 식품’이라는 라벨을 붙였다. 국내에서는 정관장 혈당 및 체지방 관리 전문 브랜드 ‘GLPro(지엘프로)’가 GLP-1 유도 성분을 포함한 건강기능식품뿐 아니라 풀무원헬스케어와 협력해 개인별 혈당 수치에 맞춘 ‘맞춤형 식단 구독 서비스’를 제공한다. 현대그린푸드 ‘그리팅(Greating)’은 기존 당뇨 식단을 세분화해 비만약 사용자를 위한 ‘근육 보존형 고단백 식단’과 소화 부담을 줄인 ‘저잔사(Low-residue) 식단’ 라인업을 확대하고 있다.

IT 업계도 비만약 열풍에 가세했다. 카카오의 혈당 관리 앱 ‘파스타’는 사용자의 실시간 혈당 데이터와 비만 치료제 복용 스케줄을 분석해 메뉴를 골라준다. 점심 시간에 인근 식당의 ‘귀리 연어 포케’ 같은 메뉴를 추천하고 바로 배달 앱으로 연결해 주문할 수 있게 하는 식이다. 노보 노디스크와 파트너십을 맺고 위고비 처방 환자들을 위한 ‘풀케어 서비스’를 론칭하기도 했다. 약물 복용 주기와 식단을 통합 관리하며 약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고단백·고식이섬유 배달 식단을 제안한다.

패션·성형·항공업계 뜻밖의 호재

패션업계도 비만치료제 열풍을 호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살 빠진 사람들이 기존 옷을 입지 못하게 되면서 새 옷을 사기 때문이다. 체형 변화로 자신감을 얻은 소비자들은 몸매를 드러내는 슬림핏과 크롭톱, 화려한 색상의 옷을 구매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전 세계적으로 큰 사이즈(L~XXL) 의류 판매량은 11% 이상 감소한 반면, 작은 사이즈(XXS~S)는 판매량이 12% 이상 늘었다. 지난 10여 년간 글로벌 패션계의 화두였던 ‘바디 포지티브(자기 몸 긍정주의)’ 열풍은 비만치료제 등장과 함께 한풀 꺾이는 모양새다. 대신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메가 트렌드였던 스키니 진이 돌아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성형업계에서도 비만치료제 열풍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체중이 단기간 급격히 줄어들면 볼살이 패고 다크서클이 심해지며 피부 탄력이 떨어지기 쉽다. 이에 따라 처진 피부를 당겨주는 리프팅, 꺼진 볼륨을 채워주는 필러 및 지방 이식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서울 청담동 C성형외과 원장은 “성형업계 패러다임이 ‘체중 감량’에서 ‘체형 관리 및 노화 교정’으로 바뀌고 있다”고 했다.

항공사는 연료비 절감이라는 뜻밖의 효과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투자은행 제프리스는 승객 평균 체중이 10% 감소할 경우 미국 항공사들의 항공기 이륙 중량이 약 1450㎏ 줄며, 이를 통해 연료비를 최대 1.5% 아낄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이에 따른 미국 항공사들의 연료비 절감액은 올해 많게는 5억8000만달러(약 87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며, 주당순이익은 최대 4%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동안 항공업계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벌여왔다. 비만치료제는 서비스 품질을 희생하지 않고도 비용 절감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항공사들에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인 셈이다.

헬스장 줄폐업, 무알코올酒 부상

모든 업종이 비만치료제 특수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헬스장은 비만치료제 등장으로 타격을 입었다. 약으로 살을 빼는 사람이 늘면서 회원이 줄고 있는 것이다. 서울 광화문의 한 헬스장에서 근무하는 트레이너는 “올해는 체감상 신규 회원이 작년보다 30% 줄었다”며 “비만치료제 영향이 상당하다고 본다”고 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폐업한 헬스장은 553곳으로 집계됐다. 이는 역대 최다 폐업 기록을 세웠던 2024년(567곳) 다음으로 많은 수치다. 코로나 사태로 영업 제한이 있었던 2020년(431곳)이나 2021년(403곳)보다도 많다. 경기 불황과 러닝·피클볼 등 새로운 운동의 유행으로 헬스장을 찾는 이들이 줄어든 상황에서 비만약 수요 증가가 큰 악재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류업계도 비만치료제 확산을 위기 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GLP-1 치료제는 식욕만 떨어뜨리는 게 아니다. 뇌에서 즐거움과 보상을 담당하는 부분에 영향을 줘 술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시들해지게 만든다. 또 위의 배출 속도를 늦추기 때문에 알코올이 위장에 오래 머물며 메스꺼움, 두통, 숙취를 유발한다.

주류업계는 무알코올·논알코올 시장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이마트의 지난해 무알코올·논알코올 맥주 매출은 전년보다 21% 늘었다. 같은 기간 일반 맥주 매출이 6.4% 줄어든 것과 대조적이다. 무알코올 맥주를 취급하는 식당은 지난해 말 기준 5만5000여 곳으로, 전년보다 70% 이상 증가했다. 하이트진로는 대표 브랜드 ‘하이트’와 ‘테라’ 모두 알코올·칼로리·당류를 없앤 제로 라인업을 선보였다. 오비맥주는 ‘카스 올제로’의 판매 채널을 온라인에서 대형 마트·편의점으로 확장하며 알코올·당류·칼로리·글루텐을 모두 뺀 ‘4무(無)’ 전략으로 소비자를 공략하고 있다. 와인 수입·유통 업체에서도 무알코올·논알코올 와인 라인업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