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권력 백성에 돌려준 세종…한글 창제는 민주·자주혁명

2026. 5. 2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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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나라』 펴낸 대중소설 거장 김진명
“세종의 한글창제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 나라, 민족, 문화도 없었다”고 강조하는 김진명 작가. 새 소설에서 한글창제의 과학적 비밀을 파고들었다. 최기웅 기자
핵 개발과 고대사, 국제 금융자본의 음모와 한자의 기원까지. 현대사와 역사적 미스터리를 소재로 한 팩션 장르의 개척자인 김진명(68). 데뷔작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 이후 누적 1500만 부 이상을 팔아치운 대중소설의 거장이다. 그가 이번에는 세종의 한글 창제기를 다룬 『세종의 나라』를 펴냈다. 스스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고구려』와 함께 3대 대표작의 하나라고 꼽을 정도로 애정이 컸다. 7개월 집필 내내 “못 쓰면 두고두고 흠이 된다”며 에너지를 쏟았고, 체중도 엄청 빠졌다. “한류의 뿌리인 한글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연구를 촉구”하는 그에게서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껴졌다.

책의 띠지에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세종의 위대한 선택. 백성을 섬기지 않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써있다. 한글이 민족·국가 정체성의 핵이며, 백성을 섬기는 자가 진정한 리더라는 얘기다. 올해는 한글창제 580년, 한글날 제정 100년이다. 지난 13일 서울 삼성동에서 그를 만났다.

Q : 한글창제 스토리에 주안점을 둔 것은?
A : “보성고·외대 동창인 최민호 세종시장의 제안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처음엔 너무 알려진 얘기라 망설였다. 다만 한글이 과학적이고 세계 제일의 언어로 높이 평가받는데 지난 600년 동안 그에 대한 올바른 담론이 없었다는 데 의구심이 들었다. 발성기관을 본따 글씨를 만들었다는데, 서양인과 동양인의 발성기관이 크게 다를까.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음양오행’의 원리도 설명이 충분치 않다.”

Q : 과학성의 핵심은.
A : “한글은 직선 획 하나에서 출발해 구부리고 더하여 만들어진 글자다. 이같은 부호의 단순성과 무한대로 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소리 글자의 우열,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다. 벽돌이 들쑥날쑥하지 않고 단일한 모양이라 집을 잘 지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점이 한글의 가장 과학적인 요소고, AI나 디지털과 결합할 때 최고 강점이다. 이를 잘 알리고 싶었다. 더구나 한류로 한글을 배우는 550만 외국인들이 한글의 원리를 알고 싶어하는 시대다.”

Q : 처음에는 집현전 학사들도 한글창제를 반대했다.
A : “전 국민 중 글을 아는 사람이 4%에 불과했고, 그나마 한자였다. 한글창제는 소수가 독점한 언어 권력을 백성에게 주는 민주 혁명이자, 한무제에 의한 고조선 멸망 이후 중국에 맞서는 자주 혁명이었다. 성리학과 중화사상이 지배적인 당시 조선에서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었다. 해례본의 음양오행 얘기도 한글창제의 참 뜻을 가리는 위장막이 아닐까 한다. 세종도 처음에는 변복하고 사가로 숨어다니며 글자를 만들었다.”

Q : 어떻게 개국 초 이런 자주를 꿈꿀 수 있었을까.
A :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이소역대(以小逆大)’ 즉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이것이 조선의 이데올로기가 됐다. 정권을 잡는데 중국이라는 외부 변수까지 생기면 너무 어려우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고개를 숙여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중국과 맞짱을 떴고 수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멸망했다. 통일신라, 고려도 이런 주종관계가 아니었다. 당연히 백성들 사이에 ‘반명’ 정서가 심했고, 세종 역시 그런 정신을 공유했을 것이다.”
백성 섬긴 세종의 선택, 한국 운명 바꿔

Q : 세종은 어떤 인물인가.
A : “팔방미인 천재다. 그 천재성은 엄청난 독서에서 온 것이다. 어려서 책을 많이 읽으면 문리가 트이는데 세종이 바로 그런 인물 같다. 태종은 아들의 몸이 너무 허약해질까 봐 책을 빼앗을 정도였다. 세종과 한글이 없었다면 조선은 몇 대 못 가 중국에 흡수됐을 수도 있다.”

Q : 한글창제기 외에 세종을 돕는 가상 인물의 로맨스가 한 축이다.
A : “소설적 재미를 위해 공녀 등 당시 지정학적 상황을 상징하는 인물의 로맨스를 전반부에 배치했다. 지금껏 내 소설 중 로맨스를 제일 길게 썼다. 나는 연애를 잘 모르고, 잘 못 쓴다. 독자들도 ‘제발 남녀 얘기는 쓰지 말라’고 할 정도다(웃음). 그래도 이번에는 꽤 괜찮게 썼고, 여성 독자들의 반응도 좋다고 들었다.”

Q : 작가들은 연애로부터 영감을 받는다던데, 연애를 모른다?
A : “어려서부터 시키는 건 죽어도 안 하고 공부도 뒷전이고 오직 책만 읽었다. 대학 가서도 2년간은 도서관에서 살면서 미팅 한번 안 했다. 읽을 만한 책은 다 읽었다 싶던 날, 교문에서 들어오는 여학생 중 맘에 드는 여학생에게 대시했다. 지금의 아내다. 군대 가기 전 가볍게 만날 사이라 여겨 입대 후 이별 편지를 썼는데 아내가 간곡한 거절의 답장을 보내왔다. 스물여섯에 결혼하고 아이 낳았다. 내게 로맨스는 이게 전부다. 로맨스를 잘 쓸 수가 없다.”

Q : 방대한 독서가 창작에 도움이 됐겠다.
A : “많은 책을, 그것도 어려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성인의 다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서로 다른 생각과 사상, 지식이 내 안에 들어와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문리가 트인다. 사통팔달 꿰뚫어 보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독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고, 경청과 인내를 가르친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그저 자신이 아는 좁은 세계에 갇힌 삶이다. 독서하는 인간만이 고급 인간이 될 수 있다.”

Q : SNS와 쇼츠의 시대, 사람들이 글을 읽지 않는다.
A : “글이 사라지고 문해력이 붕괴하면 개인의 개성, 퍼스낼러티가 사라진다. 정체성의 위기가 오고 민주주의가 붕괴된다. 모바일 문명은 빠르고 다양하고 즐겁고 좋은 점이 많지만, 모든 문제를 한없이 얕고 피상적으로 만든다. 남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야 진지한 소통이 가능한데, 디지털 기기의 특성상 즉각적인 답을 내놔야 하니 생각하는 시간이 줄고 제대로 된 판단을 못 한다. 오해와 불통이 생기고, 사람들이 공격적이 되고 황폐해진다.”
한글 ‘무한조합’ 우수성…AI시대도 강점

Q : 문해력을 올리기 위한 방법은.
A : “역시 독서다. 모바일보다 훨씬 재미있는 책의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야 한다. 근본적으로는 1등만 따지는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제일 나쁜 게 ‘공부만 잘해라, 나머지는 다 해줄게’라는 말이다. 공부라는 게, 아니 세상 모든 일이 다 실패하게 돼 있다. 공부에 실패했는데 다른 건 아무것도 갖춰져 있지 않다면 인생 전체가 무너진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세상이 어마어마하게 넓다는 걸 알게 된다. 서울대, 하버드 안 나와도 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Q : AI 시대에도 문해력은 힘이 될까.
A : “AI, 생각만 해도 공포스럽다. 그런데 가장 깨달은 사람, 예수나 부처가 AI 시대를 맞이하면 어떨까 생각해보자. 부처는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후 80세 죽을 때까지 매일 탁발하면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았다. 진리를 좇다 자살한 현대철학이 남긴 유언도 비슷하다. ‘진리가 뭔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내 인생의 운전사인 건 확실하다. 성실하게 살아라.’ 성실성은 삶을 대하는 태도다. 인간을 백만 배 능가하는 AI가 나오더라도 결국 인간은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 뿐이다. 이런 세계를 얻으면 불안할 것이 없다. 그 힘을 어디서 얻느냐? 독서다. 독서, 문해력은 지적 능력을 키울 뿐 아니라 급변하는 세상에서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 세상을 지키는 힘이 돼준다.”

Q : 소설에는 일부 중국 한자를 우리가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비슷한 주장을 담은 『글자전쟁』(2015)은 유사역사학 비판을 받았는데.
A : “한자를 한족이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중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이다. 한자의 원류인 갑골문은 글자가 5500개쯤 되고, 은나라 때 만들어졌으니 한자가 아니라 ‘은자’가 더 맞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는 중국 한자의 발음을 시대별로 연구하는데 상고음(고대 발음)에서 일부 한자와 우리말 발음이 유사하다. 가령 ‘바람 풍(風)’ 자를 ‘프람/브람’으로 읽었다. 상상력을 펼칠 근거가 충분하다. 무조건 국뽕이라고 몰아붙이기 보다 공부를 하면 좋겠다.”

Q :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을 테마로 소설을 써왔다.
A : “한때 미국 CIA 홈페이지에 ‘동북아 정세를 알고 싶으면 김진명 소설을 읽으라’는 글이 있었다. 국제관계나 역사 등 전문적 소재를 쓰는 만큼 논리적 정합성을 제일로 따진다. 기본 논지만 정해놓고, 플롯 구성이나 캐릭터 플레이 없이 그냥 쓴다. 빨리 쓰는 편이라 『직지』 하권은 열흘 만에 썼다. 쓰면서 앞 내용을 돌아보거나 고쳐 쓰는 일도 별로 없다. 종종 머릿속 생각의 속도를 손이 따라가지 못해,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쓴다고 말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때 ‘소설 읽는 재미를 처음 알았다’ ‘애국심을 처음 가져봤다’는 독자 반응이 많았는데, 작업의 큰 축이 됐다. 애국심은 나를 넘어 이웃과 사회, 나라를 아끼는 마음, 즉 휴머니즘이다.”

Q : 앞으로의 계획은.
A : “JTBC 출신 김석윤 감독이 『세종의 나라』 드라마화를 추진 중이다. 내가 극본을 쓰고 제작할 생각도 있다. 2011년 1권이 나온 총 10권짜리 『고구려』 시리즈 8권도 쓰는 중인데, 큰아들 김인서(43)가 집필에 참여하고 있다. 워낙 방대한 작업이라 생전에 완성을 못 하면 아들이 완성해도 아름답겠다고 생각한다.”
양성희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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