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란드” 소문에 몰려든 바이킹…소빙기 닥치자 전멸

2026. 5. 2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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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재의 기후가 바꾼 역사
개썰매를 탄 이누이트인이 그린란드의 미국 레이더 기지를 바라보고 있다(1966년 촬영). [사진 위키피디아]
올 초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를 매입하고 싶다는 취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면서 덴마크와 유럽 국가들의 거센 반발을 산 바 있다. 당시 트럼프의 말은 상당히 위협적으로 들렸지만, 한편으로는 ‘항상 그렇듯이 그의 즉흥적 언행에 불과한 것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들 만큼 다소 허황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19세기부터 그린란드에 대한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낸 전력이 있는 나라다. 20세기 중반에는 이곳에 공군기지를 건설했다. 따라서 이를 단지 트럼프 개인의 돌출적 발상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린란드는 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인 극히 황량한 섬이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본토 방어에 도움이 되는 군사적 요충지다. 여기에 더해 온난화로 열리고 있는 북극항로의 관문이라는 점과 이곳에 매장된 희토류·가스·석유 등 풍부한 자원 가치까지 고려하면, 최근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고 있는 수상한 발언들을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희토류·석유 풍부한 자원·군사 요충지
그런데 이 거대한 얼음 섬을 차지하는데 처음 흥미를 보였던 ‘백인’은 19세기의 미국인이 아니라 ‘붉은 머리 에릭’이라 불렸던 중세 시대 스칸디나비아의 한 인물이었다. 그는 범죄자였다. 2번의 살인죄로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 연거푸 쫓겨났기에, 당시 그가 머물 수 있는 곳은 탐험 중에 우연히 발견한 그린란드 뿐이었다. 하지만 정착 초기에 섬의 인구가 극히 적다 보니 아무리 노력해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에릭은 결국 아이슬란드로 돌아가 동족 바이킹들을 그린란드로 이주시키기 위한 설득 작업에 나섰다. 무엇보다 그의 급선무는 이 불모의 섬을 매력적이고 살기 좋은 곳으로 인식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에릭이 얼마나 고심했는지는, 그와 그의 무리가 일부러 퍼트렸을 것으로 여겨지는 ‘그린란드’라는 이름 하나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사방이 얼음뿐인 섬에 ‘그린란드’라니. 의도가 어찌 됐든 붉은 머리 에릭의 노력(?) 덕분에 표면의 81%가 얼음으로 덮여 있는 빙토가 아이러니하게도 ‘녹색의 땅’으로 불린다.

다만 붉은 머리 에릭의 무리가 그린란드 서남부에 터를 잡은 985년경은 중세온난기의 초반부였다. 여전히 생태적으로 취약한 환경이었지만 비교적 따뜻한 기후 덕분에 사람들은 목축을 기반으로 나름 안정된 정착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특히 그린란드의 기온이 최고조에 이른 1100년경에는 총인구가 약 3000명에 달했다. 이때는 유럽 전역이 따뜻했다. 노르웨이에서는 밀이 재배되었고 아이슬란드에서는 귀리와 보리가 자랐다. 포도 재배가 쉽지 않은 스코틀랜드에서도 와인을 생산할 정도였다.

13세기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반전되었다. 바이킹들은 점점 차가워지고 건조해지는 기후 속에서 작물 재배와 목축에 어려움을 겪었다. 기온 하강으로 늘어난 유빙 역시 걱정거리였다. 바다에서 떠도는 얼음 탓에 그린란드를 오가는 선박의 수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빙산과 유빙을 피해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는 경제성이 떨어졌다. 선주 입장에서 보면 빙산과의 충돌은 곧 파산을 의미했으므로 굳이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자체적인 식량 생산량이 감소하고 대륙에서 식량을 들여오는 일도 힘들어지자, 그린란드 주민들의 영양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 결국 1360년경 그린란드 남서부의 정착지가 먼저 버려졌다. 그리고 1450년경에는 근근이 버티던 남동부 마을에도 사람의 발길이 끊겼다. 15세기 말 이 지역의 바이킹 사회는 완전히 소멸했다. 그린란드의 바이킹 사회는 소빙기(1300~1850)의 기후변화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 가설, 즉 중세의 온난한 기후 덕에 척박한 그린란드 동토에 정착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후 변화하는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사라졌다는 설명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연구자들도 있다. 이들은 그린란드 바이킹 사회의 붕괴에는 기후변화뿐 아니라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한다.

바이킹 사회는 왜 그린란드에서 갑작스레 자취를 감췄을까. 만약 기후변화가 절대적인 원인이 아니었다면 그 밖에도 몇 가지 추가적인 요인을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유럽 본토와의 교역 감소가 중요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그린란드의 바이킹 사회는 석탄·철·곡물 등 주요 자원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정착 초기에는 바다코끼리 상아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두 지역 간 교역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하지만 호시절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불운은 아프리카의 질 좋은 코끼리 상아가 유럽으로 대량 유입되면서 시작됐다. 유럽 시장에서 바다코끼리 상아의 인기가 떨어지자 유럽과의 교역은 감소했고 그린란드의 물자는 점점 부족해졌다. 설상가상으로 14세기 중반 흑사병의 창궐로 사회가 불안해지면서 상아나 모피와 같은 사치품의 가치는 급락했다. 반대로 생필품의 가치는 치솟았다. 수입에 많은 것을 의존했던 그린란드 사회는 집단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둘째, 그린란드는 애초부터 농경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중세온난기에 화전과 목축의 생산성이 일시적으로 높아지기는 했지만 농업만으로는 자급자족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리한 벌목·개간·방목이 이어졌다. 얼마 있지도 않은 삼림의 파괴는 가속화됐고 식생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 결과 토양침식이 급속히 진행되면서 토지의 생산성 또한 크게 저하됐다.

1860년 그린란드에서 출판된 판화집에 수록된 그림. 바이킹들이 이누이트를 공격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셋째, 이누이트 족과의 지속적인 갈등도 불안 요인이었다. 처음에는 이누이트 족이 북쪽의 먼 지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서로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소빙기 들어 이누이트족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두 집단 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고 물리적 충돌도 잦아졌다.

넷째, 기독교 문화 특유의 배타성 또한 문제였다. 이누이트 족은 식단을 다양화하고 고도의 생존 기술을 활용해 소빙기의 기후변화에도 비교적 무리 없이 적응했다. 반면 바이킹들은 이누이트의 생활방식을 미개하다고 여기며 배척했다. 만약 그들이 성과가 불확실한 농경에 매달리지 않고 이누이트족을 따라 수렵과 어로에 눈을 돌렸다면 이후의 운명도 달라졌을지 모른다. 가령 바이킹들이 바다코끼리나 물개 고기를 좀 더 일상적인 식량으로 받아들였다면 상황은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한때 불임정책 펼친 덴마크에도 반감
이누이트 수렵민들은 환경 변화 속에서 스스로 길을 찾으며 살아남았다. 반면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신의 가호에 지나치게 의존했고 현실에 대한 판단과 대응에서 뒤처졌다. 그들이 무시한 이누이트족의 생존 전략은 결코 미개한 것이 아니었다!

그린란드의 인구 구성에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집단이 이누이트 족이다. 전체 인구의 거의 90%에 육박한다. 이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신의 땅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는 트럼프의 발언 자체에 깊은 불쾌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덴마크에 마음이 기우는 것도 아니다. 이누이트인들이 덴마크 정부에 품고 있는 불신은 뿌리가 깊다. 덴마크 정부는 오랫동안 이누이트인들에게 씻기 어려운 상처를 남겨 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60~1970년대 복지 지출을 절감하겠다는 명분 하에 이누이트 여성을 대상으로 자행한 강제 피임 시술이다.

앞서 봤듯이 이누이트 족은 극심하게 추운 환경 속에서도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적응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약 14세기부터 시작된 소빙기의 한랭화로 그린란드에 거주하던 바이킹들이 사라져 갈 때도, 이누이트인들은 기후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며 삶을 이어갔다.

로알 아문센의 탐험선에 탑승한 4명의 그린란드 이누이트인들(1903년 촬영). [사진 위키피디아]
1911년 인류 최초의 남극점 도달을 목표로 치열하게 경쟁했던 노르웨이와 영국 탐험대의 일화 또한 이누이트 문화의 탁월함을 잘 보여준다. 소빙기의 그린란드 바이킹이 겪은 고난으로부터 어떤 영감이라도 얻었던 것일까. 바이킹의 후손 로알 아문센과 그의 팀은 이누이트의 생존 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하는 위업을 이뤘다. 반면 유럽식 장비와 방식을 고수한 영국의 경쟁자 로버트 팰컨 스콧은 귀환 도중 자신을 포함한 탐험대원 모두가 사망하는 비극을 맞았다.

환경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판단으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누이트인들의 미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무척 궁금하다. 그들은 미국인이 되기를 바라지도, 덴마크인이 되고 싶어 하지도 않는 듯한데, 과연 트럼프의 구상은 그의 뜻대로 현실이 될 수 있을까.

박정재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UC 버클리에서 생물지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 『한국인의 기원』 『기후의 힘』 『인간의 시대에 오신 것을 애도합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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